경전(經典)

신중단을 향하여 반야심경을 하는 이유

동자승12 2016. 3. 17. 12:22

 

1. 신중단을 향하여 반야심경을 하는 이유

 

부처님과 보살님의 마음은 허공과 같이 텅텅 비어 있다.

 텅 비어 있으므로 일체 중생의 마음을 관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도 비게 되면 곧 부처님이나 보살님과 즉시 교통하여 신통이 나타나므로 신, 구 의의 가피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몸(身)에 가피력을 입으면 부처님과 같은 행동이 나타나고 입(口)에 가피력을 입으면 부처님과 같은 말씀이 나오고   뜻(意)에 가피력을 입으면 생각이 부처님과 같게 되는 것이다.

 

신중은 복으로 보면 인간 중생들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나 바르거나(正)바르지 않거나(邪) 착하거나(善) 악하거나(惡)하는 분별심을 내는 마음 때문에 때로는 남의 생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본래무일물인 비움(空)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부처님법을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반야심경"을 읽어드려 허공같이 텅텅 비어 있음을 알려 드리는 것이다.

 

2. 왜 신중단을 향해 반야심경을 독송할까?

1947년 봉암사 결사 때 중단 예불이 반야심경 독송으로 바뀌어

 

예불시 신중단을 향해 반야심경 독송을 하는 것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불자들이 많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說)이 있고 스님들의 방편적인 답변도 많지만, 학계는 봉암사 결사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봉암사 결사’란 1947년 성철스님, 청담스님, 자운스님, 월산스님 등이 주축이 되어 당시 일본불교로 흐려진 한국 불교를 바로 잡고 선불교(禪佛敎)의 중흥을 모색한 모임이다.

그 전까지는 상단예불, 중단예불 식으로 신중단에도 중단예불을 하였는데 봉암사 결사에서부터 중단예불을 반야심경으로 대체하였다.

반야심경의 내용이 선종(禪宗)이 추구하는 목표를 잘 반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력수행(自力修行)을 하는 선종의 입장에서 ‘궁극적 모델은 부처님이며 불교를 외호하는 신중은 예경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불법을 들려주어 깨닫게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는 불교를 외호하는 신중들이 불법을 공부하는 스님들보다 격이 낮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통종파적인 예불의례가 선종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며, 이것이 점차 사찰에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의례로 정착된 것이다. 이러한 신중단 반야심경 독송은 스님 중심, 특히 선종 중심의 의례라는 학술적인 비판이 있다. 그렇다면 재가신도는 어떤 마음으로 신중단 반야심경 독송을 할 것인가? 스님들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 반야심경을 대신 설한다는 마음으로 신중 독송을 하지만, 재가신도는 그 분들이 즐기는 법공양(法供養)을 올린다는 마음으로 독송을 하면 좋을 것이다.

 

3. 예불시 신중단을 보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이유

 

“예불의식 가운데 기존의 신중단(神衆壇) 예경의식이 현재의 <반야심경> 독송으로 변화된 것은 성철·청담스님이 선법(禪法) 중흥을 위해 주도한 ‘봉암사(鳳巖寺) 결사’에서 비롯됐다.”

한국불교 예불의례의 변화과정을 통해 현대 한국불교 예불의식이 갖는 의의를 고찰하는 등 한국불교 예불만을 집중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화제다.

송현주씨(종교학과)의 서울대 ’98 박사학위 논문 ‘근대 한국불교 예불의 성격에 관한 연구’는 한국불교 연구분야에서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것으로, 예불의례만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현대 한국불교 예불의례가 성립된 배경과 의미를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지금까지 한국불교의례는 영산재, 예수재, 수륙재 등 대규모 전문의례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돼 왔으며 출가 수행자 중심의 대자의례(對自儀禮)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송씨는 월운스님의 <일용의식수문기(日用儀式隨聞記)>에 나타난 현대 불교예불 형식이 자리잡게된 ‘시점’에 주목하고 “현대 불교의례는 전통예불 의식에 비해 선(禪) 중심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한국불교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자신의 종파적 정체성을 선종(禪宗)에서 찾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송씨는 1947년 성철스님과 청담스님, 자운스님, 월산스님 등이 경북 봉암사에서 결사를 맺고 선법의 중흥을 모색한 것이 한국불교 예불의례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고있다. 이 결사 기간동안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의 주도하에 신중단 예경의식이 <반야심경>의 독송의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봉암사 결사는 일본불교인 ‘대처불교’를 밀어내고 한국불교를 재흥시키는 초석이 됐던 결사로, 특히 성철스님은 한국불교의 내적 정화의 하나로 한국불교 전래의 의식에 대한 개혁을 강조했었다. 신중단 예경의식이 <반야심경> 독송으로 바뀌게 된것도 선종의 의식개혁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송씨는 “중단예불이 <반야심경>으로 대체된 것은 이 경전이 지닌 선종과의 친화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력수행(自力修行)을 목표로 하는 선종의 입장에서 궁극적 모델로 삼는 이상적 인간형이 부처님이기 때문”이라며 “신중에게 예배하는 것을 반대하고 신중들에게 불법을 들려주어 깨닫게 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송씨는 “현대 한국불교의 예불의례에서 사용하고 있는 예불형식은 과거 통종파적 성격으로부터 선종 중심의 성격으로 재편되어온 과정”이라며 “이러한 변화는 비록 전체 예불의식 중 일부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대웅전 상단예불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한국불교가 자신의 종파적 주체성을 선종에서 찾았음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또 <일용의식수문기>에 의하면 현대 한국 예불의례가 현재와 같은 형식으로 정립된 것은 1950년 전후로, 현행 대웅전의 상단(上壇)예불문이 <칠정례(七頂禮)>로 정리되어 널리 쓰이기 시작하는데 송씨는 이러한 변화를 한국역사에서 194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있었던 식민통치와 해방의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일본에 의해 문호가 개방된 후 한국불교는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외래종교와의 대면, 일본 종파불교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종파적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는 것. 일제하의 이러한 상황은 불교의식 문헌 속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대각교의식(大覺敎儀式)>, <석문의범(釋門儀範)> 등은 종래의 의식집과는 달리 의식을 간소화하고 모든 의식문을 한글로 표기하여 포교의 자료로 삼고자 하고 있다.

송씨는 “종래에 간행된 불교의식집들이 종파적으로 구분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에 발간된 <석문의범> 등은 선(禪)·교(敎)를 구분하는 등 한국불교 교단의 정체성 탐구노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송씨는 “선종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적(知的), 엘리트적 성향 때문에 민중 교화의 차원에서 의례화의 기제(機制)로서는 한계를 지닌다”며 “교리적·사상적으로는 그 취약성을 화엄사상으로 보완하고, 의례면에서는 정토와 밀교 등을 통해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작법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 없이는 현대 한국불교의 예불이 지금까지 선종중심으로 재편되어 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전개양상 역시 선종중심의 성향이 강화된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현대불교신문 기사 99년 2월 17일자)

 

(전략)신중단(神衆團)을 향해 반야심경을 하지 않습니까? 신중단이란 제석천신(帝釋天神), 사천왕신(四天王神), 팔부성신(八部星神), 팔만사천화엄금강신(八萬四千華嚴金剛神), 조왕신(?王神), 산신(山神)등 모든 신을 다 모셔놓은 곳이거든요.

부처님이나 깨달으신 큰 선지식 스님들이 신중단을 향해 서서 반야심경을 하시면 “가거라 가거라 저 언덕으로 가거라(揭諦 揭諦 婆羅揭諦 婆羅僧揭諦 菩提娑婆訶 )”하는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들에게 최상의 반야심경 일구(一句) 법문을 해 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분들은 십지(十地) 가운데 보통 2지, 3지까지 올라간 대단한 분이거든요. 권능을 부릴 수 있고, 복과 재앙을 줄 수 있으며, 바람과 불을 부리고, 천하조화를 부릴 수 있는 권능이 있는 신이지요. 따라서 깨치지 못한 스님들이 하면 말이 달라집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갑시다. 갑시다. 저 언덕에 갑시다”하는 것이 됩니다. 깨치지도 않았고, 2지, 3지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감히 그 분들께 “가라! 가라!”하면 안되겠지요.

그런데 스님들이 서서 반야심경한다고 일반 신도님들도 그대로 서서 반야심경을 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먼저 삼배를 하고 서서 반야심경을 외우며 “가겠습니다. 가겠습니다. 저 언덕으로 가겠습니다” 해야 됩니다.

왜 스님들은 절을 하지 않고 서서할까요?. 다 가사(袈裟) 덕입니다. 무상 대법왕(無上大法王)의 가사를 입었기 때문에 하늘의 제석천신(帝釋天神)도 절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고 부처님도 법왕의 아들이니 절을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가사에는 25조(條)도 있고 9조도 있습니다. 9조 이상부터는 대덕선사(大德禪師), 25조는 대종사(大宗師)가 수하거든요. 가사의 복판에는 3신불이 있습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이 가사의 뒤, 복판에 있습니다. 8폭은 8보살입니다. 보현, 문수, 대세지, 관음, 지장, 미륵, 금강장등입니다. 양쪽의 폭은 성문, 연각의 2승(二乘)입니다. 앞의 제일 큰 2개의 폭은 6도(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의 문입니다. 6도의 문을 가사의 폭으로 끌어안아서 제도한다는 것이지요. 네 귀퉁이는 하늘의 사천왕신입니다. 불, 법, 승 삼보를 보호하는 옹호신이지요. 6도의 중생을 옹호하며 삼보를 해치는 자에게 가차없이 철퇴를 내립니다.

이렇듯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은 부처님, 삼신불, 팔보살, 성문, 연각을 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신이 어찌 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제자, 법왕의 제자가 되어 수기를 받아, 이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직 부처가 되지는 않았지만 장차 공부하여 부처님이 될 분인데 어찌 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보호하며, 열심히 참선 공부하도록 먹는 것. 입는 것만큼은 걱정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산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부처님만 모시고 있어도 먹을 것이 들어옵니다. 부처님이 100년은 사셔야 되는데 80살까지 사셨거든요. 20년 동안 남은 음덕을 후세의 말세 중생에게 남겨 주셨어요. 그 덕으로 산꼭대기거나 저자거리거나, 혹은 시궁창일지라도 부처님을 모시면 찾아와서 절을 하고 공양을 올려요. 그것이 부처님 공덕이지요.

그러나 가사를 벗어버리면 똑같이 절을 해야됩니다. 제가 이 먹물 옷을 벗어 놓고 양복을 입는다면 어느 누가 저에게 와서 절하고 공양을 올리겠습니까?

전에 해인사에 있을 때 어느 대처스님이 양복을 입고 왔어요. 김동화박사라고 태고종 종정까지 하신 분인데 나에게 절을 공손히 해요. 그분 연세가 70이시고 내 나이 스물 몇 살이었는데 그분이 실력이 모자라서 인사를 했겠습니까? 왜 제게 인사를 하십니까? 했더니, ‘스님은 나이도 적고 아는 것도 나보다 적지만 그래도 출가해서 선방에서 수행을 잘 하고 있으니 그것이 부러워서 절을 합니다.’해요. 그분 자신의 절로 돌아가서 먹물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오체투지(五體投地)하고 큰스님 큰스님하고 절하며 공양을 올리겠지요. 그러나 양복을 입고 있으면 누구도 공양을 올리지 않는데요.

 

그런데 1965년 이전에는 스님들도 신중단에 절을 했습니다. 효봉(曉峰)스님 동산(東山)스님께서도 절을 하시는 것을 보고, 출가 당시에도 주지 스님이 항상 절을 하시는 것을 보고 그렇게 알았는데 나중에 성철(聖哲)스님과 청담(靑潭)스님이 주축이 되어 불교 정화운동을 하신 후에 바로 잡은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교리를 잘 아셨지요. 부처님께서 비구계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사를 수한 스님에게는 제석천신이 절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가사를 수한 스님은 일반 사회 사람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이 법입니다. 부모에게도 절을 하지 않고 오히려 부모가 절을 해야됩니다. 국왕에게도 절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왕에게 절을 하면 국왕에게 해가 되고 부모가 가사를 수한 아들에게 절을 받으면 단명하는 등의 감복(減福)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대처 비구 정화후에 밝혀 그 후로부터 법대로 하게 했습니다. (후략)

(계룡산 학림사 오등시민선원 대원선사님의 법문 중에서 일부 발췌)

 

4. [펌] 삼천배를 하는 이유? | 반야심경 2004/12/05 22:49

 

흔히 '3천 배 하라' 하면 '나를 보기 위해' 3천 배 하라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면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느 점으로 보든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남을 이익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3천 배 기도를 시키는 것인데,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나를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3천 배 절을 하고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그 변화가 오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을 하는 것이 잘 안 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3천 배는 그전부터 시켰는데, 본격적으로는 6·25사변 뒤 경남 통영 안정사 토굴에 있을 때부터입니다.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만이라도 해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는 승려인데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이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 그래도 자꾸 찾아오길래 할 수 없이 철망을 쳤지요.

그래서 성전에서 철망 치고 한 10년 살았지요. 철망 치고 산 것도 겉으로 보면 도도한 것 같은데, 그런 것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부처님을 찾으시오' 하고 말입니다. 내가 무슨 불교인이라고, 어떻게 무엇으로 부처님을 대행하겠습니까. 나야 그저 산중에 사는 사람이니 산사람이지요."

..성철스님과의 인터뷰..중에서

 

5. ⊙ 왜 신중단을 향해 반야심경을 독송할까?

 

1947년 봉암사 결사 때 중단 예불이 반야심경 독송으로 바뀌어...

예불시 신중단을 향해 반야심경 독송을 하는 것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불자들이 많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說)이 있고 스님들의 방편적인 답변도 많지만,

학계는 봉암사 결사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봉암사 결사’란 1947년 성철스님, 청담스님, 자운스님, 월산스님 등이

주축이 되어 당시 일본 불교로 흐려진 한국 불교를 바로 잡고 선불교(禪佛敎)의 중흥을 모색한 모임이다.

그 전까지는 상단예불, 중단예불 식으로 신중단에도 중단예불을 하였는데

봉암사 결사에서부터 중단예불을 반야심경으로 대체하였다.

반야심경의 내용이 선종(禪宗)이 추구하는 목표를 잘 반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력수행(自力修行)을 하는 선종의 입장에서 ‘궁극적 모델은 부처님이며 불교를 외호하는 신중은 예경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불법을 들려주어 깨닫게 하는 대상’ 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는 불교를 외호하는 신중들이 불법을 공부하는 스님들보다 격이 낮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통종파적인 예불의례가 선종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며,

이것이 점차 사찰에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의례로 정착된 것이다.

이러한 신중단 반야심경 독송은 스님 중심, 특히 선종 중심의 의례라는

학술적인 비판이 있다.

그렇다면 재가신도는 어떤 마음으로 신중단 반야심경 독송을 할 것인가?

스님들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 반야심경을 대신 설한다는 마음으로

신중 독송을 하지만, 재가신도는 그 분들이 즐기는 법공양(法供養)을

올린다는 마음으로 독송을 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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