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의 세계로 인도하는 보살의 방편
옛 조사 스님들께서는 "계정혜 삼학은 가마솥의 세 발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솥이 넘어지지 않고 제 몫을 다 하기 위해서는 솥의 세 발이 온전해야만 가능한 것처럼 불자의 올바른 삶도 또한 계정혜 삼학을 균수(均修)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불자(佛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불법승 삼보(佛法僧 三寶)에 귀의해야 합니다. 만약 삼보에 귀의하지 않는 불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올바른 불자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삼보에 귀의하지 않은 사람을 어찌 불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다음에는 계(戒)를 수지해야 합니다. 계는 덕행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계를 받아 지니는 그 순간에 과거에 지은 모든 업장은 소멸하고, 잃어버린 청정성을 되찾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계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법명(法名)을 받을 준비가 된 겁니다. 이는 삼보에 귀의하지 않고 계를 받지 않으면, 올바른 불자가 아니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계(戒)라고 하면 출가한 스님들이 받는 사미 10계와 구족계로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가 있습니다. 또 대승의 보살계로 10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가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무거운 계율이라 하더라도 그 기본은 오계(五戒)입니다.
오계는 첫째 중생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둘째 훔치지 말라[不偸盜], 셋째 사음하지 말라[不邪淫],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 다섯 째 술 마시지 말라[不飮酒]입니다. 오계는 불교에 귀의한 남녀(男女) 재가불자(在家佛子)가 받아 지녀야하는 근본 계율입니다.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살도음망(殺盜淫妄)은 본질적인 계라 하여 성계(性戒)라 합니다. 네 가지 계를 범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남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섯 번째의 술[酒]은 상계(相戒)라고 합니다. 술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과음(過飮)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와 남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에 “계로써 너의 스승을 삼으라.”하셨습니다. 계(戒)가 곧 여래(如來)의 청정한 법신[淸淨法身]이요, 본심(本心)이기 때문입니다. 계(戒)를 받아 지닌다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윤리 도덕과 규범을 지켜 가정의 질서나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오계 가운데 어느 것 하나만이라도 잘 지킬려는 노력과 실천력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계를 잘 지킴으로써 덕행이 원만해질 것이며, 마침내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는 온갖 번뇌 망상과 악업의 근원인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을 능히 잠재울 수 있습니다. 불자는 모름지기 지계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계를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향하여 치닫는 마음을 멈추고[止], 쉬고[休], 머물러야[住] 합니다.
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욕망을 향해 치닫는 마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욕망을 향해 치닫는 마음을 멈추지 않고는 계를 지킬 수 없습니다. 멈춤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고, 계도 또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멈춤[止]이 곧 정[定]'이라고 말한 겁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분노와 욕망에 들떠 있는 마음을 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쉬면 비로소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미혹에 싸여 감추어져 있던 본신의 지혜가 몰록 그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지혜로운 그 순간에 마음을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평화롭고 밝은 마음의 상태를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본래 청정한 자신의 진면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부중생은 그런 경계가 다가서면 무섭고 두려워 벗어나고야 맙니다.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아야 한다[放下着]"는 가르침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허망한 욕망을 향하여 치닫는 마음을 쉬고, 적적(寂寂)함을 되찾아 지혜와 선정을 닦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려놓음으로써 지계의 생활이 가능하고, 선정도 또한 닦을 수 있습니다.
지계(持戒)의 생활은 일체의 바깥 경계에 마음이 따라 움직이지 않으니 더 이상 사견(邪見)에 미혹(迷惑)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간택(揀擇)하는 분별망상에 들뜨지 않기에 청정한 불성(佛性)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계를 지킴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온전한 마음의 평정을 얻고자 한다면, 힘써 계를 지켜야 할 일입니다.
계를 지키면 고요함[定]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견(邪見)과 옳고 그름의 분별망상에 들떠 그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견에 물들지 않고 본래 청정한 본심을 지켜나가려면 계를 준수해야 하고, 선정(禪定)을 닦아야 합니다.
계를 받아 잘 지니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하여 바로 선정(禪定)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선정(禪定)의 세계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은 지선(至善)에 머무르게 되어 자연 계행(戒行)이 청정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계(戒)와 정(定)은 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수경에 “계(戒)와 정(定)의 가르침을 빨리 해득하기를 원하옵니다[願我速得戒定道].” 라고 발원한 것입니다.
정(定)은 지혜로써 진정한 이치를 사유하여 산란치 않은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드는 겁니다. 소위 경계(境界)에 탐착(貪着)하거나 집착(執着)하지 않는 겁니다. 범부중생으로서 경계에 탐착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흘 굶은 사람이 먹을 것을 앞에 놓고 탐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양귀비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편안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탐착(貪着)’이라는 말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든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그렇게 대할 수 있다면 ‘고요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간직한 고요함이 자칫 무기(無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마음이라 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미혹한 대상 경계에 접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맑은 물처럼 고요하여 걸림이 없는 마음이 곧 고요한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아상(我相)을 비롯한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상(相)에 집착하면 계(戒)와 정(定)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계(戒)와 정(定)에서 어긋나게 되면 조촐한 마음을 간직할 수 없습니다. 조촐한 마음에는 일체의 허망함이 없습니다. 선악(善惡)의 시비(是非)가 끊어졌으니, 나와 너의 차별상(差別相)이 없습니다. 있다 없다, 높다 낮다, 귀하다 추하다 하는 차별상도 아주 없습니다. 부처와 중생으로 나누어 보는 분별상조차도 끊어지니 일체상에 머무는 바가 없어 자유롭습니다.
일체 경계에 "머무는 바가 없다[無所住]"는 말은 어떠한 경계나 상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머무르되 탐착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일어남이 없다[無起], 태어남이 없다[無生], 함이 없다[無爲]는 말은 모두 그런 뜻입니다. 정(定)에 몰입한 사람은 조촐하여 경계를 만나도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한 줄기 시원한 바람 같습니다. 능히 삼독심의 무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정(定)을 성취하고 나면 자연히 혜(慧)가 열리게 됩니다. 혜(慧)는 지혜(智慧)라, 인도말로는 반야(般若)라 합니다. 반야는 곧 부처님의 지혜[佛智]이니, 범부중생이 반야를 얻기 위해서는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아야 합니다. 마음을 닦으면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 밝은 달빛이 가득한 이치와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일체의 경계를 접하더라도 마음이 경계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혜(慧)를 얻은 이때로부터 비로소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삼계(三界)에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일도 더 이상 없습니다. 생사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부지런히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계정혜 삼학은 반야삼매(般若三昧)를 이루고, 성불(成佛)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