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이야기

소설가 강석경, '저 절(寺)로 가는 사람'

동자승12 2015. 6. 13. 17:41

"비어있는 아름다운 경주(慶州), 왜 자꾸만 채우려는지...."

스님들과 나눈 대화 모아 산문집 펴낸 소설가 강석경, 단편집 '저 절(寺)로 가는 사람'

"예술서 자아 찾는 내 모습, 수행자들 절에 간 이유와 닮아"
승려의 모습, 출가 전후로 나눠 서정적이고 정갈한 문체로 그려

"여기는 가을에 일몰(日沒) 때 오면 제일 좋아요. 경주는 비어 있기 때문에 고도(古都)이고, 그게 경주의 아름다움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황룡사를 복원한다며 자꾸 채우려고 해요."

소설가 강석경씨가 경주 황룡사지의 빈터를 돌아보며 안타까워했다. 강씨는 황룡사 목조 9층탑이 서 있던 자리에서 1000년 넘게 햇빛과 달빛을 받고 비바람에 씻긴 초석(礎石)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경주시는 2025년까지 '신라 왕경 복원' 사업을 벌이며 황룡사를 비롯해 8곳을 재현하기로 했다. 그러나 강씨는 "비어 있는 경주가 상상력을 자극해서 더 좋은데, 복원을 한다며 오히려 더 망쳐놓지나 않을까…"라며 걱정했다.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를 찾은 소설가 강석경씨는“부처님오신날엔 사람들이 분황사에서 연등을 들고 나와 황룡사지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며 1000년 넘게 이어지는 불심(佛心)을 강조했다.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를 찾은 소설가 강석경씨는“부처님오신날엔 사람들이 분황사에서 연등을 들고 나와 황룡사지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며 1000년 넘게 이어지는 불심(佛心)을 강조했다. /김종호 기자
대구에서 태어난 강씨는 1974년 등단해 서울에서 오래 활동하다가 1990년대 초 두 차례 인도 기행도 다녀온 떠돌이였다. 그는 1994년부터 경주에 터를 잡고 붙박이 작가처럼 글을 써왔다. 경주의 고고학 발굴을 뼈대로 삼은 장편 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을 발표했다. 경주를 음미한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과 '이 고도를 사랑한다'도 냈다. '불국토(佛國土)'였던 곳에서 살기에 불교에 심취해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승님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기록을 모아 최근 산문집 '저 절(寺)로 가는 사람'(마음산책)을 냈다. 수행자들이 '저 절'로 스스로 간 까닭을 탐구한 책이다.

강석경씨는 "젊었을 때부터 소설을 쓰러 절에 가곤 하면서 스님들에게 동질성을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문학은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결국 진정한 자기로의 귀환이잖아요. 스님들의 구도(求道)도 그와 같지 않은가요. 예술과 종교는 방법만 다르지 같은 길을 걷는 것이에요."

예술을 '세속에서의 구도'로 여기는 작가는 불교에서 숭고한 예술의 미학을 느껴왔다. "가사를 걸친 승려들이 수없이 엎드려 지고한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과 세속에서 박차 오르는 듯한 염불 소리….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열락의 광경은 그날부터 내 의식에 붙박였다"는 것. 작가는 통도사·송광사·해인사·화운사·불국사·분황사를 즐겨 찾았다. 불교의 가르침과 승려들의 삶을 작가의 눈으로 포착했다.

한 승려의 출가를 묘사하면서 '머리를 깎일 때 누군가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적었다.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소설가의 감각적 문체로 그려냈다. 송광사에서 작가는 '법당에 들어오면 무릎 꿇고 자리에 앉은 채 한 손으로 가사를 밑으로 당겨 발을 가리던 스님들의 정갈함'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기에 작가의 문체도 정갈하다. 사찰을 둘러싼 자연 묘사는 서정적이고, 승려들과의 대화는 담백하고, 경전 인용도 깔끔하다.

이 책은 고승(高僧) 열전도 아니고, 불경(佛經) 해설도 아니다. 취재한 승려들의 출가 이전과 이후를 두루 묘사하면서 승(僧)과 속(俗)을 넘나든다. 책에 등장하는 승려들은 참선(參禪)에 빠지기만 하지 않는다. 절의 살림을 맡은 승려이거나, 인도와 미국 유학도 다녀온 학승(學僧)이거나, 탱화를 그리는 예술가 승려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초연한 수행자들이지만, 도반(道伴)이 입적할 땐 '정(情)' 때문에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이 책에서 한 승려는 "이치만 알아서는 냉혈이 돼요"라며 "이치도 알고 감정도 풍부해야 자비가 생겨요"라고 말했다.

강석경씨는 "지금껏 사찰에서 취재한 것을 토대로 구도 소설을 쓸 것"이라며 "예술가 소설과 불교 소설을 결합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경주 황남동 대릉원(大陵園)의 신라 고분 옆에 우뚝 선 메타세쿼이아를 가리켰다. "저는 저 나무가 겨울에 나뭇잎을 다 떨군 모습을 좋아해요. 본질만 남은 것 같아서요."

 

ⓒ (주)경주신문사


경주유적지에서 저녁의 노을을 마주하는 기쁨은 웅혼하다. 겨울저녁 노을을 즐기는 백미 중 하나는 바로 황룡사지다.

‘남산을 마주보며 걸어가니 동쪽으로 승방지와 강당지, 금당지가 너른 벌판에 펼쳐져 있다. 아홉 나라의 적을 물리치고자 세운 팔십여 미터의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에 세웠으니 4대왕에 걸쳐 구십 삼 년 만에 대 역사를 마무리한 국가적으로 조성된 신라 최고의 국가사찰이었다’ -강석경 소설가의 ‘이 고도를 사랑한다’ 중에서 발췌-

신라 진흥왕에서 선덕여왕까지 신라의 최전성기 약 100여 년의 오랜 시간에 걸쳐 조성된 황룡사의 옛 영화로운 모습은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아 전해진다. 우뚝 솟아 경주시내를 내려보았을 목탑은 당대 아시아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가 발간한 ‘황룡사 복원기본계획’, ‘2012 황룡사 복원정비 종합계획’이라는 책자를 바탕으로 황룡사지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았다.

황룡사 빈터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늘 그렇듯 남아있는 석물들을 통해 마음의 눈으로 목탑을, 건축물을 상상한다. 앞으로 30여년에 걸쳐 가람 배치의 전모를 비롯해 황룡사 복원이 단계적으로 이뤄진다고 하지만 그 실질적인 첫 삽의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신라의 영광이여! 대한민국의 자존심으로 부활하라.

↑↑ 황룡사지 전경 항공사진.
ⓒ (주)경주신문사


-황룡사는 규모나 격조에 있어 신라제일의 사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도 차지하는 비중 높아
황룡사지는 구황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절터로, 사적 제6호로 지정돼 있다. 경주시의 7대 관광권 가운데 시내권에 속한다. 황룡사지의 전체 면적은 38만 87㎡로 도시계획상 보전녹지지역의 문화자원보존지구에 포함된다.

황룡사는 신라칠처가람지의 하나로 규모나 격조에 있어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으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 있어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컸다. 황룡사는 528년 불교가 공인된 후 처음으로 세워진 흥륜사에 이어 조영된 신라의 국찰이다.

진흥왕 553년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했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고쳐 짓게 하고 17년만에 완성하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했다고 한다. 황룡사는 착공한 지 14년만인 566년에 대략의 건물을 완공하고 569년에 주위에 담장을 둘러 1차적인 공사가 완료됐다. 그 후 진흥왕 35년인 574년, 황룡사장육존상이 만들어졌으며 584년(진평왕 6년) 이를 안치한 중금당과 그 좌우의 서금당과 동금당이 완공됐다.

↑↑ 황룡사 9층목탑 3D영상복원도.
ⓒ (주)경주신문사


-신라, 고려 두 왕조에 걸쳐 685년 동안 호국사찰로 숭앙받아 오다가 몽골 침입으로 사역 전체 소실
이후 60년이 지난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자장의 권유로 황룡사목조9층탑이 조성됐다. 이 탑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 신라 장인들이 함께 세운 것으로 이들이 국태민안의 염원을 담아 643년에 세우기 시작해 3년에 걸쳐 높이 약 80여m인 구층목탑이 완성된 것이다.

여러차레 중수와 수리를 거치다가 고려 고종 25년에 몽골의 침임을 받아 가람 전체가 불타면서 목탑도 함께 소실됐다. 결국 황룡사는 9층탑이 최초로 조성되고 신라, 고려 두 왕조에 걸쳐 6차례의 중성과 함께 685년 동안 숭앙되어 오다 고려 고종 25년에 몽골의 침임을 받아 불 타 없으졌으며 지금은 옛 터 만 남아있다. 사역 전체가 손상되어 폐허화 되었고 그 자리는 한때 민가의 경작지로 변하기도 했다.

-진흥왕때부터 시작된 황룡사 조성은 4대왕, 93년에 걸쳐 완공
진흥왕때부터 시작된 황룡사의 조성은 4대왕, 93년에 걸쳐 목조구층탑이 완공됨으로써 명실공히 신라호국대찰의 위용을 갖추게 됐다.

황룡사지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에 걸쳐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서 발굴됐다. 그 후에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주변이 발굴됐다. 발굴결과 황룡사는 담장 내의 사역(寺域)이 동~서 288m, 남~북 281m로 정방형에 가깝고 사역과 내곽 총 면적은 8만928㎡임이 밝혀졌다.

가람 배치는 중문, 목탑지, 금당지, 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된, 이른바 1탑식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했으나 금당의 좌우에 다시 각 1개의 작은 금당을 배치해 3개의 금당이 동서 1열로 배열된 1탑 3금당식의 특수한 형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 동양최대의 것으로 황룡사의 위용을 알려주는 황룡사 치미.
ⓒ (주)경주신문사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4만 9점에 달하는 우수한 유물 출토
이 황룡사지에 있었다던 장육존상을 비롯한 기록상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4만 9점에 달하는 우수한 유물이 발굴조사 때 출토됐다.

유물은 와전류, 금속류, 토기류, 자기류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와전류 중에는 특히 측면에 용을 새긴 보상화문벽돌이 출토됐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 높이 182㎝, 최대너비 105㎝나 되는 치미가 출토됐는데 이는 동양최대의 것으로 황룡사의 위용을 알려준다. 금속류로는 금동제불상, 금동제귀고리, 청동거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금동제 불상 1점은 높이 10㎝에 지나지 않는 작은 것이나 여래입상으로 도금이 매우 찬란하고 화려해 신라의 우수한 공예술을 전해 주고 있다. 토기류 가운데는 황룡사를 축조하기 위해 늪지를 매립할 때 들어간 것들이 있는데 당초 늪지를 매립해 대지를 마련했음을 알게 된다.

-2012년~올해 12월말까지 황룡사복원 심화연구 진행 중
경주시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5년 9월부터 황룡사 복원을 위한 국제학술대회 개최 및 기본 계획을 수립했다.

황룡사 유적의 건축학적 고찰 등 기초1차연구는 2007년 8월 실시했으며 2007년 12월, 황룡사구층목탑의 기존복원안 구조해석 등의 기초2차연구, 2009년 황룡사출토유물 연구와 금당구조연구 등의 기초3차연구, 2010년 황룡사 유구보존과학적 조사 등의 기초4차연구, 2011년 황룡사 복원정비 종합계획수립 등의 기초5차연구 등은 5개년에 걸친 황룡사 복원정비 종합 계획이었다. 2012년 7월부터 올해 12월 말까지 황룡사복원 심화연구가 진행중이다.

-황룡사연구센터건립공사 한창, 목탑과 금당 등 황룡사 유적 이해하는 기회 제공
황룡사지 한켠에는 황룡사연구센터를 위한 건립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센터는 지난해 7월 착공해 총사업비 130억원을 들여 2015년 12월 준공할 예정이다. 모형전시실, 3D영상관, 학예연구실, 전시실, 전망휴게실, 관람발코니 등을 갖출 예정이라고.

이 연구센터는 황룡사복원사업의 비전, 단계별 사업의 추진내용, 향후 계획 등 홍보역할을 담당하며 유적지와의 연계를 통해 목탑, 금당 등 황룡사 유적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또 황룡사 복원 축소모형, 3D 영상 등을 활용한 적극적이고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관람객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전시형 이벤트 제공 및 통합적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 단계별 복원조감도는 복원과정에 대한 이해를 눞이고자 기존 복원안을 토대로 3D작업을 통해 이미지화 한 것임.<황룡사 복원 사진=고영관 (주)제로온 대표 제공.>
ⓒ (주)경주신문사


-황룡사 복원, 약 30여년에 걸쳐 2900억원 비용 소요될 것으로 예상
황룡사 복원사업은 한국의 문화유산보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기존의 단순한 보존 위주의 문화재 보존정책에서 보존과 활용이라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사업이다. 이를 위한 가장 선행돼야 할 것은 문화재 보존과 활용의 조화다. 특히 활용을 위해 보존이 손상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저한 고증에 기초한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 황룡사 복원 사업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았을때 약 30여년에 걸쳐 2900억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황룡사복원계획수립에 따른 주변도로 및 기반시설 정비와 토지매입 등에 있어서는 별도의 예산 확보와 그 시행 조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복원 사업 추진의 단계별 추진은 1단계 복원정비 마스터플랜수립을 거쳐 2단계 복원설계 및 정비(2011~2015), 3단계 실제건물복원(2016~2025), 4단계 역사문화환경정비(2026~2035)로서 중장기로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