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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문관(無門關)의 의의와 성립

동자승12 2015. 11. 14. 16:56

무문관(無門關)의 의의

진리를 대상 관계에서 구하고자 하는 사상은 이제 종말의 대단원에 오지 않았나 한다. 진리를 설정하고 그를 대상화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대상 속에서 진리를 얻고자 하는 태도는 인간에게서 주체적 창조성을 빼앗고 비소에의 타락과 인생의 공허와 방황과 충동을 끝없이 되풀이하게 한다.

 

그렇다고 일체를 부정하고 부정도 부정하여 마침내 바닥부터 방하(放下)하는 슬기도 없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악몽의 반복을 굳세게 믿고 나아가야 하는 현대가 안은 고민이 있다.

 

이를 불교의 지자들은 미망(迷妄) 전도(顚倒)라고 부르거니와, 슬프다 어찌하여 우리는 자존(自存)하는 자신의 구원(久遠)의 햇빛에 착안하지 못할까? 일체 희론(戱論)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 엄연한 실상 현실을 외면하기 바쁠까? 겁전 이후의 결정 요인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도 밖으로 밖으로 종속과 공허를 되씹기에 내달아야 할까!

여기에 선의 가르침이 있다. ‘이것이 꿀이다’ 하고 눈앞에 들이대고 입 안에 넣어 준다. 이론이나 말이 아니다. 어느 종교의 교설과도 상관없다. 바로 인간과 존재의 해명이며 정면 제시다. 인간과 역사의 본연 동력이며 궤도이다.


그래서 『무문관』은 현대인에게 이 문이 없는 진리의 문으로 인도하는 적절한 길잡이이며, 또한 성자의 곡진한 자비와 지혜에서 이루어진 무한공급에의 문이라 하겠다. 이 『무문관』 한 권이 전해지는 영광을 충심으로 기리는 바이다.


혜개의 『무문관』은 이와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보다 중요한 점은 당시(송나라)의 중국의 불교사상을 비롯해서 그 성쇠의 과정과 선종(禪宗)에 대한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송나라의 송태조(宋太組) 5대 중에서 후주(後周)의 무장(武將) 조광윤(趙匡胤)이 후주의 선(禪)을 받아서 왕위에 오르자, 개봉(開封)에다가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송이라 했던 것이다.


송나라 시절의 중국 불교는 겨우 당조(唐祖)의 불교를 유지하는 현상에 불과했고 발달한 점은 별로 없으나, 『대장경』의 출판 사업만은 괄목할 만한 점이 많다고 하겠다. 남송(南宋)의 고종(高宗), 1127~1163 때 출세한 대혜(大慧, 1089~1163)는 그 당시의 선법(禪法)이 극도로 쇠퇴했음을 개탄한 것으로 보아 그 시절의 불교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송나라 말엽에 이르러서는 쇠퇴한 정도가 아니라 극도로 타락에 빠졌던 것이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도첩(度牒) 또는 도연(度緣)이라고 불리는 승니(僧尼)가 출가할 때에 조정에서 세금을 면하기 위해서 주는 허가증을 매매(賣買)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가 하면, 도첩의 공채화(公債化), 도첩의 매가(賣價), 승민과세(僧民課稅,) 면역전(免役錢,) 면정전(免丁田) 등 불도(佛徒)들의 타락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송대에 있어 불교가 이와 같이 쇠퇴해진 반면에 유교는 나날이 부흥해 갔다. 이로 인해서 두 교 사이의 반목과 질시는 날로 심해져서 유교인들의 불교 배척은 극심한 상태에 이르러 이에 대한 방위를 위해서 여러 가지 서적이 나왔던 것이다.

 

명교계숭(明敎契崇, 1017에 입적함)의 『보교편(補敎篇)』은 구양수(歐陽修)의 『본론(本論)』에 장기영(張高英)의 『호법론(護法論)』과 『삼교평심론(三敎平心論)』은 모두 배불(排佛)의 화살을 막고 있는 논들이다. 뿐만 아니라 휘종(徽宗, 1101~1125)도 불교를 배격하고 도교를 신봉했던 정도였으니 가히 그 당시의 양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끝으로 선종에 관한 다소의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선종’은 일명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하며, 달마 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처음 전교한 종지이다. 교외별전을 종(宗)의 강격(綱格)으로 하고, 좌선으로써 내관자성(內觀自省)하여 자기 스스로의 심성을 철견(徹見)하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함을 종요(宗要)로 삼는 종파라 하겠다.

 

선종이란 말은 부처님의 설교를 소의로 삼는 종파를 교종이라 함에 대하여 좌선을 닦는 종지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나라 말엽부터 선종과 교종의 세력이 대립하여 교 밖에 선이 있다는 치우친 소견을 내고 교외별전의 참뜻을 잃게 되어, 도리어 선종이라는 명칭을 배척하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종은 석존에게서 정법의 유촉을 받은 가섭으로부터 달마 대사까지의 28조가 있고, 제28조인 보리달마가 520년(양의 보통 1년) 중국에 와서 혜가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5조 홍인 대사에 이르러 그 문염에서 혜능(慧能)을 제6조로 하는 남종과, 신수를 제6조로 하는 북종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북종은 오래지 않아서 후손이 끊어지고, 혜능의 일류(一流)만이 번성하여 5가 7종을 냈던 것이다. 그 후, 원과 명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종파가 모두 쇠퇴하게 되었으나 이 선종만은 오히려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무문관(無門關) 성립시기


표문・자서・후서를 보건대, 무문이 동가의 용상사(龍翔寺)에서 지낸 조정 원년(1228년, 고려장경 판각하기 11년 전) 여름에 대중을 위해 초록 집성한 것이 그해 7월 10일이고, 동년 11월 15일에 판각 완성하여 다음해 1월 5일 이종(理宗)에게 제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보면 『무문관』은 무문 46세의 저작이다. 그러나 『무문관』이 무문 일대의 온오의 결정임을 생각할 때 그 배후에는 무문이 보인사에 출세한 이래 10년간의 사상적 축적의 성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문관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면 『무문관』은 과연 무문 자신이 말했듯이 고칙의 잡연한 집성은 아니다. 무문은 자서에서 “이 한 개의 무자(無字), 이것이 종문의 첫째 관문이다. 이에 이를 이름하여 선종무문관이라 하였다.” 하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조주 무자는 이 한 권을 일관하고 있는 중심 사상이며 동시에 무문의 전면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문은 이 무 한 자의 전개 형식으로 일단 고칙 48칙을 염제(拈提)하여 본서를 이루어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문관』 에 담긴 고칙 공안은 그 대개가 『전등록』, 『오등회원』, 『선문염송집』에 실려 있어 지금껏 우리나라 종문에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이나 『무문관』 은 필자 비재의 탓으로 불행히도 아직 국내 유통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다만 괄목할 사실은 고 설봉(雪峰) 노사가 『무문관』각 칙에 평송(評頌)을 가한 것이 노사 생존시에는 운무에 묻혔더니 근년에 와서 사의 고제 금산(金山) 선백에 의하여 범어사 내원선사에서 간행을 보았다. 우리 나라 종문의 성사로 기록할 일이다.




 

출처 : 통도사 비로암
글쓴이 : 보현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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