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論介) / 3일절을 보내면서 생각나는 사람
조선중기
건국 200년 후의 진주 기생신분(妓生身分)이며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였으나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倭將)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散華)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 사실이 사후 27년 뒤 문헌이나 금석문(金石文)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12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기생도 시대를 잘 타고나야 영웅이 되는 것은 예나 다름이 없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재위 1720∼172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이다.
비(妃)는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이고, 계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 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그녀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경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 홍백순(洪百淳)· 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 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 출신이며, 양반 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논개의 시 정리 1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 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중요 시어 및 시구-
* 거룩한 분노 ― '나라 찾기'와 연관된 성스럽고 위대한 분노.
* 불붙는 정열 ― 불타는 애국심
* 푸른 물결 ― 영원한 역사(청사)
* 붉은 마음 ― 일편단심(조국애)
*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 분노를 띤 논개의 의연하고 승화된 모습
* 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 ―
논개의 아름답고 영원한 영혼의 변함없음.
※주제 ⇒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논개의 애국적 충혼
[ 시상의 흐름(짜임) ]
☀ 1연 : 논개의 침략자에 대한 분노와 애국적 정열 (동기)
☀ 2연 : 논개의 의로운 죽음 (행위)
☀ 3연 : 논개의 꽃다운 충혼 - 추모의 정 (의의)
지은이: 卞榮魯(1897.5.9~1961.3.14)
변영로는 1920년대의 감상적이며 병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을 두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고, 1924년 시집 〈조선의 마음〉으로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페허〉의 동인이면서도 〈백조〉류의 낭만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건강한 서정성과 민족정신을 드러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서정적 가락과 민족애가 함께 어우러져있는
작품인 <논개>로, 특히 붉음과 푸름의 색채대비를 통해 민족에 대한 일편단심과 좌절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노래했다.
1950년대에는 주로 수필을 많이 썼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논개의 시 정리 2.
戊辰年 六月日에 단을 무어 焚香하며
三百名 女妓들이 精誠으로 妓祭하니
論娘子 忠魂義魄이 늬라실가 하노라.
*키워드: 무진년 고종7년(1868),
*忠魂義魄:충성스런 혼과 의로운 넋.
무지년 유월에 제단을 만들어 향을 사르며
삼백 명 기생들이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니
논개의 충성스런 혼과 의로운 넋이 강림할까 하노라.
*논개의 시 정리 3.
矗石樓 발근 달이 論娘子의 넉시로다
향국한 일편단심 천만년에 비취오니
아마도 여중충의난 이뿐인가 하노라
*통석(通釋)
촉석루에 비추는 밝은 달이 논개의 넋이 틀림없다
나라 위한 조그만한 애국심이 길이 후세에 비추니
아마도 여자 가운데 충의는 이것뿐인가 하노라.
*논개의 시 정리 4.
말고말근 江南水야 임진 이름 네 알니라
忠臣과 義士덜이 몃몃치나 빠저난고
아마도 女中丈夫난 論娘子가 하노라
*통석(通釋)
맑고 맑은 남강 물아 임진왜란 때 있었던 일을
네가 알 것이다.
충신과 의사들이 얼마나 물에 빠졌느냐.
아마도 여자 중에 뛰어난 사람은 논개인가 하노라.
*논개의 시 정리 5.
海東國 三千里에 許多한 바위로다
風磨雨洗하면 어느 돌이 안 변變하리
그 中에서 一片義巖언 萬古不變하리라.
-교방가요초(敎坊歌謠抄)-
키워드: 風磨雨洗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기면.
*통석(通釋)
우리나라 삼천리강산에 바위들이 많이 있다만
세월이 흐르면 어느 바위가 변하지 않겠느냐
그 가운데 의암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으리라.
*작자미상(作者未詳)에 대한 -취람 여포 생각-
고종 2년 1865년 정현석이 엮은 노래와 춤에 관한 책인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수록 되어있다. 책의 끝에 정현석에 대해“합천(陜川) 草溪 鄭氏로 벼슬이 해백(海伯)에 이르렀고 대대로 강원도 橫城郡에 살았다”라고 되어있다.
작자 미상이 아니라 국가적 행사인 妓祭에 형식적으로 참석하여 추모시를 짓고 사대부 체면에 본인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좀 찜찜해서 일부러 기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의 황진이 묘소에 부임지로 가면서 찬술 한잔 부어 놓고
"잔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 라고 읊은 임제(林悌1549(명종4)∼1587(선조20)를 닮은 멋진 사내대장부가 없었던 것은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도 있다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을 연호도 없이'임진왜란'이라고 육십갑자로 기록한 나라꼴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논개가 진주 남강 의암에 왜장과 함께 산화(散華)? 동반(同伴) 익사(溺死)한지 272년 후의 일이 아닌가. 사대부출신이나 혹은 글께나 쓴다는 작자들의 이중성이 보인다.
親日派 作家..反日 作家니 하는 것 자체가 低質 코메디 이다
논개가 자기 할머니였더라면 작자미상(作者未詳)이 되었겠는가?
***********************************백과사전의 기술 **************************************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 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그녀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경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 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 출신이며, 양반 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