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經典)

고려불화 이야기

동자승12 2017. 3. 25. 22:39

고려 불화 이야기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오래된 미술품을 파는 경매장이 있습니다. 얼마 전 그 경매장에서 우리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비싼 값으로 팔린 그림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시대에 그려진 불화였습니다. 불화는 불교에 나오는 부처님이나 보살을 주제로 그린 그림입니다. 불화에는 절간의 벽그림, 처마 끝의 단청 장식, 걸개 그림(탱화),불경의 내용에 곁들여진 삽화(변상도) 등,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겠지만 보살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지요? 보살은 이를테면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부처님 후보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세상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는 분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관음보살을 많이 그렸는데 그림이 굉장히 섬세하고 화려합니다. 옷의 가느다란 주름과 오색찬란한 구슬까지도 아주 자세하게 그렸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훌륭한 지 서양사람들의 눈에도 대단히 아름답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관음보살은 여러 보살 중에서도 우리 사람하고 가장 가까운 분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에 ‘일연’이라는 훌륭한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라 때, 유명한 스님이 두분 계셨습니다. ‘의상’과 ‘원효’입니다. 이 두 분은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에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 두 스님은 산골 깊숙이에 있는 동굴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한 밤중이 되어 ‘원효’는 너무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지요. 어두컴컴한 동굴 바닥을 손으로 더듬다가 물이 마침 물이 담겨 있는 바가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갈증이 심했던 터라 “꿀꺽꿀꺽”소리를 내며 단숨에 바가지의 물을 다 마셔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잠이 들었지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짐을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 순간, 발끝에서 무언가가 채여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언가 하고 보았더니 끔찍하게도 사람의 두개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놀라 자빠질 일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해골 안에 고여 있는 물을 본 순간, “아차! 어젯밤에 내가 달게 마셨던 물이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꾸역꾸역” 토악질을 했습니다. 곁에 있던 의상이 걱정어린 눈초리로 등을 두들겨 주었지만 곧 진정이 되었습니다. 잠시 후, 원효는 동굴 앞 넓직한 바위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의상은 애초의 계획대로 당나라로 건너가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원효는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 길로 경주로 돌아가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과 함께 하는 스님이 되었지요. ‘깨달음’이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해골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먹었을 때에는 정말 꿀맛 같던 물이 다음 날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을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해골물에 얽힌 이야기로 유명한 두 스님과 관음 보살이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해의 낙산으로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관음보살이 실제로 낙산의 어느 절벽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직접 만나 뵈러 갔습니다. 의상은 낙산에 도착해서 절벽 앞 펑퍼짐한 돌 위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앉았던 자리의 돌을 뜯어내어 동해바다에 띄웠더니 갑자기 바닷 속에서 용궁의 신하 8명이 나타나더니 컴컴한 굴속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굴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예배를 했더니 수정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습니다. 염주는 스님들이 손에 걸고 다니는 구슬과 같은 것인데 한 알마다 인간의 괴로움과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염주알을 한 알씩 넘기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을 외면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고 극락으로 가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상이 수정염주를 받아 가지고 다시 낙산으로 나오자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역시 여의주 한 개를 바쳤습니다. 기도를 한지 일주일 되는 날, 드디어 의상은 관음보살을 실제로 볼 수 있었습니다. 관음보살이 나타나 말하기를, “앉은자리 위,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이니 꼭 그곳에다가 절을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더니 과연 대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났습니다. 곧 그 자리에 금당을 짓고 불상을 만들어 모셨습니다. 그랬더니 대나무가 도로 없어져서 과연 이곳이 진짜로 관음보살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고 지었습니다. ‘낙산’은 원래 관음보살이 사신다는 남해바다 어디인가의 [보타락가산]이라는 이름에서 ‘낙산’을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그 뒤, ‘원효’가 의상의 뒤를 이어 낙산으로 예배를 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 가다가 경주 남쪽 교외의 논 가운데에서 벼를 베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가는 길이 하도 멀고 지루하다 보니 원효는 슬그머니 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농담 삼아 애써 추수한 벼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도 농담으로 받아, 벼가 흉년이 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어떤 다리 밑에 도착하니 웬 여인이 냇물에서 속옷을 빨고 있었습니다. 마침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먼길을 가는 중인데, 목이 말라 그러니 물 한바가지만 주시겠소?” 그러자 여인은 자기가 속옷을 빨았던 그 더러운 물을 한바가지 퍼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효는 화가 났지만 깨달음을 구하러 가는 입장에서 싸울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더러운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깨끗한 냇물을 떠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들판 한가운데 오래된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놀랍게도 사람처럼 말을 했습니다. “원효는 단념하라.” 하고는 갑자기 간곳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파랑새가 떠난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고개를 여러 번 넘고 냇물을 몇 개나 건너서 원효는 낙산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착해서 바로 금당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관음보살상 자리 밑에 들판 소나무 아래에서 본 신발 한 짝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원효는 빨래를 빨던 여인과 벼를 추수하던 여인 모두가 관음보살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일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관음솔’이라고 불렀습니다. 원효에게 말을 했던 파랑새도 사실은 관음보살을 그린 불화에 자주 등장하는 새입니다. 원효가 의상이 머물던 그 신성한 굴에 들어가 다시 한번 관음보살의 산 모습을 보려고 했지만 때아닌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관음보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관음보살은 원효의 어떤 점 때문에 만나려 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아직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 자세가 덜되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원효가 관음보살을 못 보았다고 반드시 의상보다 훌륭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전해져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꼭 사실이라고 믿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한번 실수는 있는 법이니까요. 위에 소개한 이야기들 말고도 관음보살에 얽힌 이야기는 아주 많습니다.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누군가 몸이 아플 때에는 약병을 들고 나타나며, 사람들이 유혹에 빠지거나 나쁜 일을 하려고 하면 아주 엄격한 분이 되시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도 가지가지입니다. 때로는 아리따운 여인으로, 때로는 새로, 때로는 할머니로.... 관음보살은 주로 여성의 모습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과 친하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기 때문이지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 중에는 “천수천안 관음보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관음보살이 앉아 있는데, 몸둘레에 팔이 천 개나 나와 있고 각각의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달려 있는 그림이지요.


조금 징그럽게 생각되겠지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팔이 천 개, 눈이 천 개가 달린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또 얼굴이 모두 열한 개인 관음보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경주의 석굴암에 조각되어 있는11면 관음보살상입니다. 석굴암에는 단단한 화강암에 도드라지게 새겨 놓은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11면관음상은 가장 우수한 솜씨를 보이며 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근엄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을 띄고 있고,전체적인 몸의 비례도 적당해서 보기에 좋습니다. 11개의 얼굴은 모두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습니다. 화를 내는 표정, 자비로운 표정이 있는가 하면 이를 드러낼 정도로 무서운 표정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 불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는 [수월관음도] 를 들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에 많이 그려졌기 때문에 ‘고려불화’하면, 수월관음도가 제일 먼저 떠오를 정도입니다. [수월관음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재동자’라는 소년이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여러 곳을 다니다가 관음보살이 사신다는 남해바다에 다다릅니다.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보타락산’에 도착하여 우연히 관음보살을 만나서, 자비로운 말씀을 듣는다.”는 내용입니다. 물가에는 바위 위에 걸터앉은 관음보살이 있고, 그 아래에는 선재동자가 공손히 절을 하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자비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병, 푸른 대나무, 파랑새 등과 달이 꼭 등장합니다.


이 그림은 투명한 옷의 흐름과 화려한 구슬장식 등이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불화 중에서도 수월관음도처럼, 걸개그림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탱화’라고 부릅니다. 그 탱화의 내용은 주로 나라를 생각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권세있는 집안에서 자신들의 안녕과 잘 되기를 비는 뜻이 많습니다.


불화는 그냥 보고 즐기는 그림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필요한 쓰임새 있는 그림입니다. 불화에서는 멀리 있다고 작게 그리거나, 가까이 있다고 크게 그리는 원근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의 불화는 섬세함이 많이 줄어들고 좀더 단순해졌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나라에서 불교를 믿으라고 부추겼지만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억눌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리 나라 고유의 산신령이나 땅신 등을 불화의 주제로 같이 그리게 됩니다. 그래서 절에 가보면 산신각이나, 삼성각 같은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불화를 소화해서 받아 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도 가끔씩 잡지책 같은 곳에서 탱화를 그리는 아주머니를 소개하는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절에서는 그분들을 ‘보살’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때의 보살은 부처님이 되기 위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신자 중에서도 아주 성실한 여자들을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분들 중에 어느 분은 수십 년 동안이나 불화를 그리는 데에 열과 정성을 다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의 뛰어난 솜씨를 후세에까지 전해 주려면 이분들 처럼 한 길만 파는 삶을 사시는 분들이 꼭 필요하겠지요?


어쩌다 절에 갈 기회가 생겨서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 보면 왠지 으시시하고 색깔도 촌스러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금만 더 자세히 뜯어보세요. 거기에는 여러분의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산신령 할아버지까지 등장하여 우리 인간의 삶을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줄 것인가 하고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테니까요. <글쓴이: 서울 신창중 조소영>


출처:
http://parktag.tistory.com/40 [박희탁의 미술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