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 스님과 인연 맺고 가난하게 살아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단 걸 알아습니다”
“경봉 스님 생존하실 때는 뭐가 뭔지 몰랐어요.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면서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것과. 숨김이 없이 잘못한 건 참회하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통도사 산내 백련정사
신도 고문을 맡고 있는 신백련성 보살님은 극락선원에서 8년간 경봉 스님을 시봉하면서, “돈이 많아도 떳떳하지 못할 때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것을 알았을 때 경봉 큰스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
“경봉 스님께서 백련암을 도와주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하신단다.
“맺지 않으려 해도 닿는 게 인연이라. 참 신기도 하지요
”백련성 보살님은 백련정사에서 총무로 28년, 신도 회장으로 9년, 이제 젊은 보살에게 신도
회장을 물려주고 지금은 고문으로 절 살림을 보살피며 지금의 백련정사와 역사를 같이 해왔다.
신백련성 보살님이 오랫동안 백련정사에 머물게 된 것은 경봉 스님과의 인연이 때문이다. 경봉 스님과 인연은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6살에 위궤양에 걸려 요양할 절을 찾아다니다 극락선원에 가게 된 보살님은 그곳에서 경봉 스님을 친견하게 된다. 하지만 보살님은 그것이 인연인지 알지 못했다.
“경봉 스님께서는 어느 날 여러 명 보살들과 함께 극락선원에 갔었는데, 나를 불러서 ”보살아 자주 오너라 하실 때 무슨 말씀인지 몰랐어요. 훗날 백련암에 들렸다. 경봉 스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극락선원에 다시 가야지 생각 했어요”
‘도인 스님’으로 소문난 경봉 스님을 두 번째 친견한 것은 친구들이 “경봉 스님에게 사주 보러가자”고 해서다. 극락선원에 다녀 온 이후로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신백련성 보살님은 두 번째 친견에서 ‘백련성’이라는 불명을 경봉 스님으로 부터 받았다.
“경봉 스님께서 나를 알아보고 ‘자네 영도에서 왔지?’라 말씀 하시면서.‘내 시봉도 좀 하고 자
주 오느라’하시며 나와 함께 간 친구 세 명 중에 조용히 나를 부르시더니 글을 한 폭 주시면서‘ 자네는 지금 백련암이 곤란하니 도와줘라. 자네는 할 수 있다’라고 하셨어요. 그 때 원산 스님이 옆에 계셨습니다.
'백련성’이라는 불명을 지어 주신 것은 보살수계를 주신 것과 마찬가지 이지요" 자식이 없어 아이 가지려고, 동래 금강사에 왔다 갔다 한 것 밖에 없는데 뭘 알아야지요. 이때는 너무 당황하여 대답도 못 했습니다”
29살 되던 해까지 아이가 없어 동래 금강 원 금강사에 기도하러 다닌 것이 전부였던 보살(신백련성)에게는 경봉 스님의 말씀(백련암을 도와줘라)은 한 낮 뜬 구름처럼 들리기만 했다.
“3일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숙제(절로 갈 것 인지?) 때문에 머리가 아파 습니다”
신백련성 보살님은 그해 칠월칠석날 백련암에 기도를 하러가 첫 불사에 동참하게 됐다. 다리 불사였다. 당시에는 길이 없어 백련암까지 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비됐다. 그렇다보니 신도들도 적었고, 사찰 불사를 하려고해도 자재를 운반할 길이 없었다. 당시 신도는 16명이 전부 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연이 되려고 그런 건데, 당시에는 너무 기분 나빴어요. 3일간 기도를 마치고나니 거기 있던 보살이 권선문을 내놓으면서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였어요.
'그래 얼마나 있으면 되냐‘ 고 했더니 50만원이 필요하다 하였어요. 당시 내 형편으론 큰돈이 아니였지만, 당시로선 엄청 큰 돈 이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내 지갑에 있던 오만원을 주면서,‘나는 오만원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시주 하라고 하지마세요’하고 집으로 돌아 왔지요"
'다시는 백련암에 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백련암을 내려왔지만, 신백련성 보살님은 왠지 미안함에 잠이 오지 않았단다. “3일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숙제 때문에. 그 돈 때문에 내가 잘못한 것이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보살한테 전화하여 다리를 놓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봄에 백련암 총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우리 원산 스님이 원리원칙 대로 잘하니깐 도와주게 된 거지요"
"3년간 무문 관 결사를 실천할 만큼 대단한분 이시라.” 하시면서 당시 원산스님께서 무문관에 계실 때 밥공기 들어갈 구멍으로 필요한 것 주고받으신 쪽지를 지갑에서 꺼내 보이신다.
원산스님도 이런 쪽지를 가지고 계시는지 알지를 못하셨다.
대처승이 살다가 나간 백련암은, 숟가락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때 총무를 맡은 신백련성 보살님은 전화, 전기를 놓고, 불사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전각 불사 등을 추진해 왔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위궤양도 치료됐다고 하신다.
“보시는 저축하는 것보다 났다” 신백련성 보살님은 백련암 총무 생활을 하면서 극락선원에 있는 경봉스님을 시봉했다. 시봉을 드는 스님들도 3개월 을 제대로 못 버티는 힘든 일 이었지만, 그는 스님이입적하는 날까지 8년을 모셨다. 백련성 보살은 경봉 스님을 모시면서 글을 받아 지인들에게 권선을 하러 다니고 있었다. 극락선원 불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46세 때 부터 완전히 극락선원에서 머물면서 경봉 스님을 시봉했지요. 내가 오후 6시에 들어가면 밤12까지 시봉하고, 시자가 1시부터 시작하면 아침 6시까지 하고. 시간을 바꿔 가면서 교대로 했어요. 경봉 스님께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내가 가면 전체적으로 처리할 사람은 백련성 자네 밖에 없다. 자네가 전부 처리 다 해라" 하셨어요. 경봉 스님께서는 입적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백련성 보살에게 사후처리를 마끼신 것 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런 큰일을 당한 경험이 없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어요, 혼란한 마음에 음식을 장만할 물건을 사 왔지만 그래도 두 번 시장은 가지 않았어요. 모자란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고 딱 맞았어요. 모두 입적하신 경봉 큰스님께서 도와주신 거라 생각 합니다,,,,,.”
신백련성 보살님은 5일 동안 경봉 스님의 영결식을 치르면서 잠 한숨 자지 못했다. 뼈가 들어날 정도로 발 을 다쳤지만, 아픈 줄도 모를 정도였다. 이 후에도 그는 49재를 비롯해 100재까지 모두 자신이 직접 준비해 경봉 스님을 추모했다. '참불자로 거듭나게 한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고 싶어서였다.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깐 보시는 하면 은행에 저축한 것보다 났다. 또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그 가피력으로 모든 것이 이뤄진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더라고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경봉 스님을 도인 스님이라 하였는데 긴가 민가 했지요. 하나 있는 딸이 고등학교 시절, 많이 아파 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니 딸의 아픈 몸이 언제 아파는 지도 모러게 얼굴이 맑아지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부처님에 대한 의심이 사라져 버렸어요"
“마음 닦는 공부를 지금이라도 정말 하고 싶어”백련성 보살님은 경봉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내가 잘 못되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면서 누구 탓 할 것 없고, 누구를 의지해
믿는 것도 아니다 는 것 을 알게 되었어요“, "모두 나로 인하여 일이 발생되고.,,그럴 때면 내 불성을 찾아가 내가 나를 믿어야, 지 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또 이기는 것은 절대 이기는 게 아닌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이상 딴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신백련성 보살님은 “마음 닦는 공부를 제일 하고 싶어요. 불성은 자기한테 있는 거니깐. 방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을 대 비하여 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보살님은 건강 하시다. 간혹 무리하게 절 살림을 사시다보니 간혹 병원 신세
를 질 때도 있으나 언제나 백련정사를 찾는 방문객들이 오시면 환하게 웃으시며 반갑게 맞이 하신다.
원산도명 스님은 ‘만인동참 만일 염불회’를 창설하여 2008년 11월 12일 오전 10시 백련정사(백련암) 큰 법당에서 ‘만인동참 만일염불회’의 입재법회를 갖고 1만 일간 기도에 들어갔다. 만일 염불회는 1만 명이 한자리에서 1만 일간 염불선(아미타불 연호)을 통해 깨달음과 안락을 얻고 정토에 왕생함을 발원하는 기도로, 불교의 전통 수행법이며 백련정사의 창사정신 이기도 하다. 원산스님의 큰 염원의 실행은 늘 뒤에서 묵묵히 힘이 되시는 신백련성 보살님이 계시기에 가능 하다.
지월(智月)의 변(辯)
신백련성 보살님은 4년 전 원산스님과 통도사 앞 남산 환경훼손 반대운동을 할 당시 백련정사
에 들리면서 처음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6개월 동안 남산 환경훼손 반대운동 문제로 통도사와 백련정사, 남산을 다닐 때 언제나 감사하게 해 주셔서 늘 옆에서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위의 글은 국내 한 사찰에서 운영하는 사찰보의 기자가 신백련성 보살님과 인터뷰 하신 후 '사찰보'에 실린 내용이 인터뷰 내용과 틀려서 신백련성 보살님께서 마음불편 하시는 모습을 보고 인터뷰 당시 내가 옆에서 있었기 때문에 사찰보기자가 쓴 글이 기자의 뜻대로 쓰여진 내용이라 다시 수정하여 지월의 일기장에 남겨둔 것을 오픈 한다.
오픈하는 이유는 얼마 전 통도사 산내 암자에서 특별한 보살님의 49재가 마무리 되면서, 일반 보살님이라도 부처님과 스님에 대한 지극 정성함은 훗날 스님과 주위 불자님들에게도 많은 정신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신백련성 보살님이 건강하셔서 우리 곁에 오래오래 지내셨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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