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고 싶은 암자와 절집 사람들

[스크랩] 경봉(鏡峰)스님 열반 34주기 추모다례재

동자승12 2016. 7. 16. 12:53

평생 수행 전법하며 후학 무명 밝혀

혜월 한암 용성 만해 스님과 법담

1927년 통도사 화엄산림법회 개설 


일제강점기와 해방 등 격동의 세월에도 수행에 몰두하고, 중생들에게 지남(指南)을 보여준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 양산 장날이면 장터에 불화(佛畵)를 걸어 놓고 쉽고 재미있는 법문을 해서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평생 전법(傳法)의 길을 걸으며 후학들의 무명을 밝혀준 경봉스님의 삶과 수행을 지난 1일 34주기 추모다례에 즈음해 소개한다.

 

 

  
경봉스님. 1955년 스님 세수 64세 때의 모습이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서한을 주고받으며 돈독한 인연을 이어온 효봉스님과 경봉스님(오른쪽). 경봉스님보다 세수가 네 살 많았지만 늦게 출가한 효봉스님은 편지를 보낼 때 도우(道友) 또는 선제(禪第)라고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 경봉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삶이고 수행이었다. 18세 되던 해인 1910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수십 년 이어온 스님의 일기는 근현대불교사일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우리 민족의 실록(實錄)이라해도 지나침이 없다.


혜월, 한암, 용성, 만공, 제산, 만해, 효봉 스님과의 법담(法談)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일기는 1982년 9월3일 스님의 49재를 맞아 공개됐다. 사라질 뻔한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1970년대 중반 경봉스님이 시자 명정스님에게 일기를 모두 아궁이에 넣어 태우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명정스님이 간곡히 만류하여 보존될 수 있었다.


경봉스님의 법음(法音)이 생생한 일기는 1910년 1월1일 시작하여 1976년 4월8일까지 66년을 기록하고 있다. 1927년 동짓달부터 원적에 들 때까지 스님의 주석처를 제목으로 한 <삼소굴일지(三笑窟日誌)>가 1985년 세상에 나왔다.


 법정스님은 “경봉선사의 법담과 선시, 그리고 선지식의 가풍을 접할 수 있다”면서 “승가의 가풍이며 절 살림살이의 양상도 넘볼 수 있어 현대 한국불교사의 귀중한 자료”라고 서문을 썼다.


○…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이운해 온 후 조성된 통도사 금강계단은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의 성소(聖所)이다. 부처님 정골진신사리(頂骨眞身舍利)를 봉안한 이래 시작된 탑돌이 불공과 금강계단 전통의식은 한국전쟁 당시 끊겼다.


금강계단 전통의식은 자장율사 이후 15일마다 행해진 수계의식이며, 탑돌이는 사리탑을 돌며 신도들이 예경하는 의식이다. 탑돌이와 금강계단 의식은 1981년 5월3일 30년만에 복원됐다. 경봉스님은 월하, 벽안스님 등과 함께 전통의례를 복원하여 불자들에게 신심 고양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때 경봉스님은 ‘통도사 성역화에 대한 역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설법을 했다.


○… 경봉스님은 만해스님의 영향을 받았다. 1912년부터 3년간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 만해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만해스님에게 ‘화엄의 세계’를 맛본 것이다. 1967년 10월 만해스님 비를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 세울 때 경봉스님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기구 명칭은 ‘고 만해 한용운 선사 묘지 이장(移葬) 및 입비(立碑) 추진위원회’ 였다.


당시 경봉스님이 직접 쓴 모연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스님 가신지도 벌써 21개 성상(星霜), 애통하게도 망우리 공동묘지 누구 하나 찾을 이 없는 폐허 속에서 불교와 조국을 걱정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남아 있는 후래로선 뼈 아픈 통절(痛切)과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 스님의 묘지 이장과 건비(建碑)를 위한 추진을 발기하오니….”


○…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장욱진 화백이 영축산을 찾았다. 하루 종일 산을 헤집고 다니다 경봉스님을 조우했다. 스님이 질문했다. “선생은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깊은 산을 홀로 헤매고 다니는 거요.” 장욱진 화백은 “까치집을 그리려고 다니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선승(禪僧)과 화백(畵伯)의 산중 만남이었다.


평범한 대화 같지만, 그 안에는 법(法)의 향기가 진하게 들어 있다. 한참을 쳐다보던 경봉스님이 다시 말을 건넸다. “출가 했으면 도를 통했겠구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다 그만두고 양주에 화실을 마련해 홀로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한 장욱진 화백이 답했다. “스님, 까치집 그리는데도 도가 있는 것 아닙니까.” 경봉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닐런지. 장욱진 화백은 모친이 예산 수덕사를 오래 다닌 불자였으며, 1932년 만공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수덕사에 머물며 요양했을 정도로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미륵존여래불’, ‘팔상도’ 등 불교 소재 작품을 다수 남겼다.


○… “여기 필름처럼 인생을 산 중생이 앉아있군.” 청주대 연극영화과 교수를 지낸 김수용 원로 영화감독이 1980년대 초반 무렵 통도사에서 경봉스님을 친견했다. 그날 경봉스님은 하루 종일 김 감독에게 먹을 갈게 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필름처럼 인생을 산 중생”이라고 김 감독에게 말을 던졌다.


 김수용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속세와 등진 수도자가 세속에 물든 영화를 봤을리도 없는데,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족집게로 집어내는데 놀랐다”면서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고 회고했다. 그 때 경봉스님의 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도(道)를 닦은 사람은 거울 속을 보듯이 모든 것을 훤히 볼 수 있는 것이네.”


○… 1982년 7월21일 사바와 인연을 다한 경봉스님의 영결식이 통도사 극락암에서 엄숙하게 봉행됐다. 영결식과 다비식에는 전국에서 운집한 스님과 신도 등 10만여 명이 구름처럼 모였다. 종정 고암스님은 법어에서 “함박꽃이 피니 보살 얼굴이요, 종려잎이 흩어지니 야차 머리 같도다 … 능히 삼라만상에 주인이 되고, 사계절의 핍박을 받지 않도다”라고 설했다.


월하스님은 영결사에서 “이미 맺어놓은 법연(法緣)을 저버리지 마시고, 세상에 다시 출현해 정법의 깃발을 세워 달라”고 전했다. 경봉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은 일반 언론의 관심도 컸다. <경향신문>은 그해 7월23일자에서 이례적으로 지면의 3분1이 넘는 6단 박스 기사로 보도했다. MBC는 밤 9시 ‘뉴스센터’에서 경봉스님의 다비식과 불교의례 등을 다룬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방영하기도 했다.

“법문 마음에 새기고 수행 매진” 

           

경봉대종사 34주기 추모다례

  
 

경봉(鏡峰)스님 열반 34주기 추모다례재가 지난 1일 통도사 극락암에서 봉행됐다. 다례재에서는 후학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했다. <사진>


다례재에는 영축총림 방장 원명스님, 주지 영배스님, 경봉문도회 대표 법산스님 등 사부대중 500여명이 동참했다. 문도대표 법산스님은 “경봉스님의 긍지와 법문을 마음에 새기고 후학들은 수행을 통한 깨달음과 학업에 더욱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추모다례재에 이어 경봉장학회는 동국대, 중앙승가대, 동양대학 등 학사과정과 석·박사 과정에 있는 스님 42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극락암 호국선원, 보광선원, 서운암 무위선원에 수행지원금과 영축율학승가대학원 연구비 800만원을 전달했다.

통도사=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경봉스님 행장

 

189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광주 김씨. 속명 용국(鏞國), 법명 정석(靖錫), 시호 원광(圓光), 법호 경봉(鏡峰). 1905년 죽하재 강달수 선생 문하에서 한학 연찬. 1906년 모친 별세로 인생무상 느끼고 진리 탐구 발원. 1907년 6월 통도사 성해스님을 은사로 출가. 청호스님에게 사미계 수지. 1911년 4월 해담스님에게 비구계, 보살계 수지. 1912~1914년 통도사 강원 수학, 만해스님에게 <화엄경> 배움. 1915년 이후 양산 내원사, 해인사 퇴설당,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내원선원 참선 수행. 1919년 양산 내원사 주지. 1925년 통도사 만일염불회 창설. 1927년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21일 화엄산림법회 개설. 1932년 통도사 강원 원장(학장). 1935년 통도사 주지. 1946년 불교혁신총연맹본부 위원장,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이사장. 1949년 통도사 주지. 1950년 밀양 무봉선원 수행. 1953년 3일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 추대. 납자 및 불자 지도. 1982년 7월17일(음력 윤 5월27일) 원적, 세수 91세. 법납 75세. 저서 <법해> <원광한화> <선문묵일점> <화중연화소식> <삼소굴일지>


■ 경봉스님 어록

 

벼가 부처, 보리가 법(法), 콩이 승보(僧寶) … 이 몸이 곧 극락이다. - 경봉스님 법어

 

수좌들은 재발심해야 한다. 자기의 심정을 살펴보아 처음 출가할 때의 그 마음이 식었으면 다시 발심해서 정진해야 합니다.

- 1950년대 말 종정에 추대된 효봉스님이 상경하여 정화불사 동참을 당부한 편지에 보낸 답신

 

가뭄이라고 곡식 없다 하지 마시오.(旱天莫道無田穀, 한천막도무전곡). 사월 남풍에 보리가 누렇게 익었소.(四月南風大麥黃, 사월남풍대맥황). - 한암스님이 보내온 서한에 대한 답장

 

밝은 해가 동천(東天)에 올라 와서 세계를 두루 비춤도 만물을 위함이요. 서산으로 넘어가서 광명을 감춤도 만물을 위하는 진리로다.

- 1951년 4월 한암 스님 열반 추도문

 

옷이라도 수의라 하니까 대중의 마음도 이상하게 섭섭한 느낌이 든다. 내 생각에는 거래생멸(去來生滅, 오고 가고 나고 죽음)이 없는 것이지만 세상 인연이 다해가는 모양이니 무상이 더욱 느껴진다. … 예전부터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靑山)은 우뚝 섰고 녹수(綠水)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으냐 쯧쯧 야반삼경에 촛불 춤추는 것을 보아라.

- 1966년 경봉스님이 수의(壽衣)를 짓던 날 일기.

[불교신문3217호/2016년7월13일자]

 

출처 : 통도사 비로암
글쓴이 : 海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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