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고 싶은 암자와 절집 사람들

[스크랩] 설악 무산(1932~2018) 스님은 적멸을 향했으나, 詩는 여기 남았다

동자승12 2018. 5. 29. 17:42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 무산 대종사는 적멸의 세계로 가시었다. 설악 무산(1932~2018) 스님은 적멸을 향했으나, 는 여기 남았다.  


'인천만 낙조'

 

그날 저녁은 유별나게 물이 붉다붉다 싶더니만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그 늙은 어부가 그만 다음날은 보이지 않네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그 어느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때


지난 26입적(入寂)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 무산 대종사는 적멸의 세계로 가시었다.


설악 무산(1932~2018) 스님은 시조 '적멸을 위하여'에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스님은 2018526일 오후 511분 승랍 62, 세랍 87세로 입적(入寂)하셨다.

설악(법호) 무산(법명) 대종사는 속명 조오현으로 시조를 써온 시인이었고, 스님에게는 시조는 선()으로 가는 길에서 마주한 속()의 언어이자 평생에 걸쳐 몰두한 경전이었다.


설악무산 스님은 1932년생으로 1957년 출가해 성천사 인월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으며 1968년 범어사에서 석암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계림사, 해운사, 봉정사, 신흥사 주지와 제8·11대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했고.

지난 2016년 조계종 최고 품계인 대종사(大宗師)’ 법계(法階)를 받았다.

 

무산 스님은 종단의 원로의원과 신흥사 조실, 백담사 조실, 조계종립 기본선원 조실 소임을 맡고 있었다. 스님의 생애와 업적을 이야기 하면서 빠지지 않는 게 만해대상 제정과 만해마을 건립이다.

 

지난 1996년에는 만해스님의 유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하고 만해대상을 매년 시상하면서 포교 활성화와 우리 문화 예술 발전에도 큰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올해가 스님이 등단한지 50주년이 되는 해로, 문집 '무산 오현 선시'가 나오기도 했다. 무산 스님의 대표작 33편에다 '시인 조오현'을 평소에 존경해온 문인 20여 명이 헌정한 인물이다.


스님의 입적(入寂)소식이 알려지자 스님을 향한 추모물결이 이어지고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스님의 입적(入寂)을 애도 하셨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저녁 7시 자신의 트위터에 마지막 무애도인으로 존경받았던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며 설악 무산스님의 입적을 애도 하셨습니다.

이어 설악 무산 스님과의 일화도 자세히 밝혀습니다.


"2016년 스님의 시인 아득한 성자인천만 낙조2편을 자신의 폐이스북에 올려셨다고 이야기 하시면서, 스님이 서울나들이 할 때마다 한번 씩 만나 곡차를 하기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매우 가까웠다는 뜻인데, "이제는 청와대 구경도 시켜 드리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면서 스님 입적 소식에 아뿔사탄식이 저절로 나왔다고 밝혔습니다.


스님은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워낙 각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는데요.

특히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김진태 전 검찰총장, 김희옥 전 동국대 총장 등 사회 각계 인사들은 존경의 마음을 스스럼 없이 표현 할 정도로 가까웠다. 지월 智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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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 소머슴으로 불계에 들어와 문학과 무관했던 오현에게 시조는 난데없이 찾아왔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첫 조우는 어릴 적 알고 지낸 친구 둘이 오현이 수련하던 암자로 찾아와 한바탕 문학론을 늘어놓자 "그따위 시나 시조는 하룻밤에 100편도 쓰겠다"고 큰소리친 뒤 밤새 끙끙대며 시조 한 편을 쓰면서부터다.


재미를 붙여 서정주·정완영 등에게 편지까지 보내가며 습작에 매달렸고, 1968'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10년 뒤 첫 시집 '심우도'를 펴냈을 때 출판사 발행인이던 시조시인 이근배는 시집 해설에 '조오현은 하나의 경이(驚異).


1970년대의 한국시가 조오현과 만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고 썼다. 오현은 6권의 시집을 남겼고, 정지용문학상·현대시조문학상 등을 받았다.오현은 흔히 선()시조의 개척자로 불린다.


시인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는 "오현은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선시조 창작자이자 본격적인 의미의 선시 완성자"라고 평했다. 그간 선시는 고대 향가 형식을 제외할 경우 한시(漢詩)로 쓰여 접근이 어려웠는데, 오현은 시조의 언어를 선의 화두로 끌어올리되 난해했던 선시의 문턱을 낮췄다.


그는 생전 "불교에서 문학이란 종교 행위의 연장 또는 대중 설득을 위한 수단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이 같은 철학에 바탕해 오현의 시조는 초기 서정시에서 정진 수행을 담은 구도시, 선적 직관의 선시로 나아간다.


눈에 띄는 지점은 '이야기 형식'. '무설설' '절간이야기' 연작처럼 사설시조에 가까운 대화체의 작법이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오현의 시조는 절간의 승려나 산간 초부(樵夫) 등 모든 계층의 인간의 말과 소리들을 포괄하고자 한다""바로 이 살아가는 것들의 말과 소리를 담아 이야기 조(調)의 시를 만들어내면서 시인으로서 아득한 성자의 길에 나선다"고 해석했다.


오현의 시조는 대중 설법(說法)의 수단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이 여실히 내면화돼 있다"는 오세영의 평처럼 그의 문학에는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보는 날이다"고 노래한 '죽어보는 날'부터 스스로를 "기는 벌레 한 마리"로 정리해버린 '내가 나를 바라보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자기반성의 시학이 담겨있다.


'지난날 내가 쓴 반흘림 서체를 보니/ 적당히 살아온 무슨 죄적만 같구나/ 붓대를 던져버리고/ 잠이나 잘 걸 그랬던가.'('내가 쓴 서체를 보니')만해 한용운이 창간한 문예지 '유심'을 복간해 시조 부흥에 앞장선 그는 외국에서도 주목받아, 시집 '적멸을 위하여'는 지난 201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영문으로 번역·출간됐다. 올해 등단 50년을 맞아 문집 '무산 오현 선시'가 나왔고, 오현의 작품 평론을 모은 '지혜의 언덕 너머 춤추는 기호'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적멸을 향했으나, 문학은 이곳에 있다.

조선일보 / 정상혁 기자


출처 : 통도사 비로암
글쓴이 : 智 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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