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신라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으므로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의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고 기도를 올리며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불교의 지도자로 만들겠습니다.”하는 축원 끝에 그의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에 들어오더니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었다. 부처님과 같은 날에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20대 초반에 논과 밭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불가에 귀의한 후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그는 방안을 가시로 둘러 움직이면 가시가 찌르도록 하였고,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졸음을 물리치는 고골관(枯骨觀)이라는 엄격한 수행(修行)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에 전념했다.
이처럼 그의 피나는 고행은 계속되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수행중인 자장을 대신(大臣)의 자리에 오르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거듭된 거절에 화가 난 왕은 조정의 관리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했다. 그때 칙사에게 준 자장의 답변은 단호하였다.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파계(破戒)를 하고 백년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스님의 단호한 답변은 고승으로서의 면모를 확인 시켜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자장의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항상 공부에 대한 한 가닥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신라는 본격적으로 불교사상이 유입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는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 실(實)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자장율사는 중국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終南山)과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五臺山 : 一名 淸凉山)에 머물렀다. 스님이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명상하다 꿈에 문수보살이 범어(梵語)로 된 게송을 주었는데 해독치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스님이 와서 해석하되 “일체법이 자성 없는 줄을 요달해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할지라도 아직 이보다 나은 글이 없다” 하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으셨던 가사(袈裟)와 부처님의 정수리 뼈와 치아사리(舍利) 그리고 발우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이후 자장율사는 더욱 수행을 깊이 하여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는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여 나라의 존망에 까지 직면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자장율사에게 소환을 명하여 이듬해, 자장율사는 당태종이 선사한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신라에 돌아온 것이다(643).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그를 궁중으로 초청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皇龍寺)에서 7일 주야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 한다.
자장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반월(半月)마다 계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비단 승려들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이면 여덟, 아홉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고자 하는 이가 해마다 늘어났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646년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이렇듯 통도사 창건은 자장율사의 피나는 구법(求法)노력의 결과이며, 거기에는 철저한 자장스님의 계율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경(經)과 논(論)에 능한 논사(論師)로 불리기보다는 율(律)에 능한 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신라의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귀국 후, 스님 중 최고 자리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된 자장율사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를 내려 규율을 단속하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순회 감독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섰다. 아울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국력의 신장과 국론의 통일을 꾀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전개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자장율사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제시한다.
또한 자장율사의 불교사상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스님의 한결같은 믿음으로 신라땅을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들이 구도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당나라로의 유학이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통하여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의 후원아래 구법의 길을 떠나 입당하여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당시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율사(律師)로 이름나 있다. 자장율사의 탄생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원효(元曉)와 의상(義相)보다는 연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자장율사는 불교치국정책의 일환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조성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등, 곳곳에 신라의 땅이 과거에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이곳 통도사도 창건하게 되었고 불국토인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삼국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과 신념에 찬 결단이었다. 이처럼 자장율사의 사상적 구심점은 바로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과 계율근본도량인 통도사 금강계단의 건립에서 보다 구체화 되었다. 즉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함으로서 신라사회와 모든 불교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통도사와 신라 최대의 거찰 황룡사를 형제 사찰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장율사보다 먼저 영축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낭지화상은 주로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으며 『화엄경(華嚴經)』에도 밝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의하면 그는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淸凉山 : 五臺山)에 구름을 타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한다. 그는 사미시절의 원효스님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자장율사도 낭지화상과 같은 동년배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낭지화상과 교류하였으리라 본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20대 초반에 논과 밭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불가에 귀의한 후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그는 방안을 가시로 둘러 움직이면 가시가 찌르도록 하였고,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졸음을 물리치는 고골관(枯骨觀)이라는 엄격한 수행(修行)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에 전념했다.
이처럼 그의 피나는 고행은 계속되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수행중인 자장을 대신(大臣)의 자리에 오르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거듭된 거절에 화가 난 왕은 조정의 관리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했다. 그때 칙사에게 준 자장의 답변은 단호하였다.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파계(破戒)를 하고 백년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스님의 단호한 답변은 고승으로서의 면모를 확인 시켜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자장의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항상 공부에 대한 한 가닥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신라는 본격적으로 불교사상이 유입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는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 실(實)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자장율사는 중국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終南山)과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五臺山 : 一名 淸凉山)에 머물렀다. 스님이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명상하다 꿈에 문수보살이 범어(梵語)로 된 게송을 주었는데 해독치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스님이 와서 해석하되 “일체법이 자성 없는 줄을 요달해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할지라도 아직 이보다 나은 글이 없다” 하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으셨던 가사(袈裟)와 부처님의 정수리 뼈와 치아사리(舍利) 그리고 발우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이후 자장율사는 더욱 수행을 깊이 하여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는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여 나라의 존망에 까지 직면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자장율사에게 소환을 명하여 이듬해, 자장율사는 당태종이 선사한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신라에 돌아온 것이다(643).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그를 궁중으로 초청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皇龍寺)에서 7일 주야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 한다.
자장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반월(半月)마다 계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비단 승려들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이면 여덟, 아홉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고자 하는 이가 해마다 늘어났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646년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이렇듯 통도사 창건은 자장율사의 피나는 구법(求法)노력의 결과이며, 거기에는 철저한 자장스님의 계율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경(經)과 논(論)에 능한 논사(論師)로 불리기보다는 율(律)에 능한 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신라의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귀국 후, 스님 중 최고 자리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된 자장율사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를 내려 규율을 단속하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순회 감독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섰다. 아울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국력의 신장과 국론의 통일을 꾀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전개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자장율사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제시한다.
또한 자장율사의 불교사상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스님의 한결같은 믿음으로 신라땅을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들이 구도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당나라로의 유학이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통하여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의 후원아래 구법의 길을 떠나 입당하여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당시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율사(律師)로 이름나 있다. 자장율사의 탄생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원효(元曉)와 의상(義相)보다는 연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자장율사는 불교치국정책의 일환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조성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등, 곳곳에 신라의 땅이 과거에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이곳 통도사도 창건하게 되었고 불국토인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삼국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과 신념에 찬 결단이었다. 이처럼 자장율사의 사상적 구심점은 바로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과 계율근본도량인 통도사 금강계단의 건립에서 보다 구체화 되었다. 즉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함으로서 신라사회와 모든 불교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통도사와 신라 최대의 거찰 황룡사를 형제 사찰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장율사보다 먼저 영축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낭지화상은 주로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으며 『화엄경(華嚴經)』에도 밝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의하면 그는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淸凉山 : 五臺山)에 구름을 타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한다. 그는 사미시절의 원효스님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자장율사도 낭지화상과 같은 동년배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낭지화상과 교류하였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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