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불종찰략사(佛宗刹略史)에 따르면, 경기도 출신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언제 어떻게 통도사에 주석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소요 태능(逍遙 太能, 1562~1649)의 문도로 알려져 있다. 우운당의 가장 큰 불사는 1641년(인조19년)에 임진왜란 때 전소된 대웅전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한 것이다.
통도사 대웅전을 중건한 우운스님은 대웅전 불사를 하고 남은 경비로 낙(落雲)스님과 함께 힘을 모아 1650년(효종1년)에 취운암을 창건하였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1652년(효종3년)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였다. 통도사의 핵심인 금강계단 수리에는 우운당의 각별한 관심과 지도가 있었던 걸로 보이며 그가 지니고 있었던 계단(戒壇)에 대한 관심은 통도사 사리에서 분사리 된 대구 용연사 계단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중수한 우운당이 착수한 다음 사은 불교목판의 판각과 간행이었다. 통도사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다. 따라서 계단의 중수에 이은 불경의 간행은 통도사의 정신을 복원하는 필연적 절차였다고 보인다. 하지만 18세기 몇 차례의 화재로 통도사 경판이 소실되어 우운당이 간행한 경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우운당은 전란으로 없어진 법당 내의 불기들을 제작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674년(현종15년)에 제작된 은입사 향완이다. 이 향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은입사 향완 가운데 가장 크며 예술적으로도 아름다워 보물 제1354호로 지정되었다. 또 이듬해인 1675년(숙종1년) 통도사 대웅전의 건립과 계단의 복원, 또 석가여래 친착가사의 전래를 담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을 중간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현재 남아있는 문헌이나 금석문이 확인되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더 많은 불사에 관여했다고 여겨진다.
통도사를 전성기 때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진력한 우운대사가 1694년 입적한다. 통도사의 사부대중은 스님의 법구를 다비하여 정골사리(머리뼈사리)2과와 진신사리 9과를 얻었다. 이에 정골사리는 통도사에 모시고 진신사리 9과를 9곳으로 나누어 각각의 지역에 스님의 부도탑을 세우게 하였다. 우운당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웅전과 금강계단의 중건→경전의 간행→법당 불기의 제작→통도사 사적약록의 완성까지 임진왜란 이후 폐허화 된 속에서 체계적이고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우운당의 행적은 폐허가 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2번째 창건이었다고 정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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