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고 싶은 암자와 절집 사람들

[스크랩] 통도사 경봉대선사 어록(語錄) 1

동자승12 2016. 10. 23. 19:39

다시 듣고 싶은 경봉대선사 어록語錄 1

                                                 - 경봉선풍중진불사회鏡峰禪風重震佛事會 취재이야기

 

1. 제자들에게 준엄한 가르침

 

도인도 밥을 자십니까? 말 배우는 사람이 되지 말라.

 

  내가 통도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학인시절 60년대 후반 경봉큰스님에 대한 첫 인상은, 법상에 오르시고 법문하고 내려오시는 일련의 모습에서 일종의 신비감과 자신감을 강하게 느꼈지요.


첫 번째, 중강仲講 시절에 하루는 궁금한 게 있어서 따로 극락암에 가서, 경전구절에 대해서 이것 저것 여쭈어 보니까 경봉스님께서 답하시기를, “학어자學語者가 되지 말라. 곧 ‘말 배우는 사람’이 되지 말라.” “경전 너무 많이 읽지 말라.” 하셨다. 그때는 강사보고 경전보지 말라니 무슨 뜻인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두 번째, 어느 여름에 극락암에 갔더니, 스님께서 선실禪室 뒷켠 툇마루에 걸터 앉으셔서 편안한 자세로 계셨다. 《선요禪要》 구절 중에 궁금한 부분을 물으니까? 스님께서 “나한테 묻는 그 놈이 뭐냐? 생각으로 따지면 십만 팔천 리다.” 하셨다.


세 번째, 10년쯤 뒤 76년 봄인가 팔공산 원효암元曉庵에서 열심히 정진하다가 음력으로 정월 말 쯤에(양력으로 2월중으로 기억) 영축산에 봄눈이 군데군데 보이던 시절이었다. 저녁에 도감실에서 차를 먹고 말씀드리기를, “팔공산에서 정진하다가 지견知見이 열려서 게송을 몇 개 지어서 갖고 왔습니다.” 하고 스님께 보여드렸더니, “아니다.” 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하셨다. 그 당시는 “왜 아니라고 하시는가?” 불만이 많았지만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통도사 패엽실貝葉室에 있을 때에는 “책 많이 보지 말라. 강의하는 책만 보고 가르치지 이것저것 책 많이 보다보면 내 지견이 안 열린다.” 하시더라. 그 때 부산에서 온 거사를 보고는 “책을 자꾸 많이 보다보면 마지막에는 생활로 돌아온다.”고 하시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사람이 동쪽으로 가려고 길을 나서서 부지런히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서쪽으로 가고 있더라. 어리석은 사람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처음 출발한 그곳으로 돌아와서 다시 보니 그 자리가 깨달음 자리더라.”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⑵“꽃을 보되 향기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라.”

 

  70년대 중반에 구도회求道會 한국불교연구원에서 《원효사상》에 대한 책이 나와서 수심법회修心法會를 할 무렵에 학생을 인솔하고 교수와 내가 함께 가서 책을 보여드렸더니, “원효가 사상이 어디 있나?” 하시더라. 한번은 달마스님에 대해서 실존인물實存人物이 아니라 가공加功으로 만든 인물이라고 학계學界에서는 주장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꽃을 보되 향기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라.” 하시더라. 한번은 어떤 거사님이 “도인도 밥을 자십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스님께서 “부처님도 공양을 하셨는데 ---.” 하시더라.

                                                - 전 중앙승가대학 총장 종범스님 인터뷰

 

 

2. 다인茶人 강수길거사가 만난 경봉스님

- 마음이란 어디를 가더라도 간 것이 아니며 와도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처음 경봉스님을 친견한 것은 아마 72년쯤, 서울 살면서 대학 2학년 때일 것이다. 우연히 어머니를 따라 극락암 도인스님 법회에 참석하자고 해서 따라갔었다.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부처님 여래如來를 표현하셨다.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온다면 언제 왔으며 간다면 언제 가는 것이냐! ‘여래如來’란 온 것 같으면서도 온 것이 아니고 간 것 같으면서도 간 것이 아닌, 즉 부처님을 말한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말씀하시기를, “마음이라는 것은 가고 오는 것이 없는 것이라 어디를 가더라도 간 것이 아니며 와도 온 것이 아니다. 온 것 같으면서 온 것이 없고, 간 것 같으면서 간 것이 없는 이것을 여래如來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먼 곳을 가더라도 이 몸을 운전하는 소소령령昭昭靈靈한 이 마음자리는 온 것도 아니요 간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자연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생활이 힘들고 재미도 없었다. 유신이 선포되고 젊은 학생들이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고래사냥 왜불러 이런 가요들이 그나마 마음을 달래던 그런 시절,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극락암을 찾으면 노스님의 법문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도활성海濤活聲’ ‘어약천강수魚躍千江水 용등만리운龍騰萬里雲’ 같은 글을 주시면서, 비바람에 떨어진 낙엽도 바람이 불면 살아 보려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하여 좋은 인연 만나면 이쁜 책속에 꽂혀서 대접을 받는다. 하물며 만물의 주인인 사람이 그까짓 세상살이에 지쳐서 힘들어하거나 죽을 결심을 하고 해서야 되겠나. 인생은 한 바탕 연극과 같다. 호쾌하게 활기차게 산 정신으로 살아가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 아닌가? 나이 많은 노스님께서 이렇게 용기를 주시니 서울 올라갈 때면 새로운 활기를 얻고 기분이 업 되어서 올라가곤 했지요! 매월 첫째 주면 으레히 고속버스를 타고 통도사를 찾아 스님법문을 들었다.


또 어느 조용한 날 경봉스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스님 눈에서 파란 안광眼光이 나와서 저에게 대단한 용기를 주셨어요! 그러다가 출가를 생각하다가 결심은 하지 못하고 집에서도 말리고 결심을 못하고 해서, 차를 수행의 방편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주로 수행다도修行茶道를 실천하며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강수길은 부산다인모임인 숙우회를 오랫 동안 지도하고 있다.)

                                              - 다인茶人 강수길 거사 자택에서의 대담

 

 

3. 동·서양이 차로 만나다

- 경봉 선사와 프랑스 석학碩學 레비스트로스의 만남

 

현존 프랑스의 최고 석학인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와의 만남은 결코 범상한 만남이 아니었다. 1981년 10월 11일부터 30일까지 장장 20여 일에 걸쳐 이루어진 레비스트로스의 방한訪韓은 근대학문이 시작된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서양의 가장 큰 학자를 초대한 행사였을 것이다. 그는 인류학자이지만 인문사회학 전반에 걸쳐서 현대학문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어 가까스로 이루어진 그의 방한은 시종 빽빽한 일정이었다.


90세 노스님 경봉 선사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선문답은 참으로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불꽃 튀는 접전接戰이었다. 기의 예봉銳鋒이 부딪히는 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거동이 불편한 경봉 선사가 그를 보자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여기 오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비행기 타고 하늘에서 왔소.”

“하늘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소.”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소.”


우리 일행은 오묘한 기감氣感으로 두 분 사이의 선문답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선문답으로 시작된 손님맞이였다. 경봉 선사도 불교계의 원로답게 시종 편안한 안색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길에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금세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마치 친구 사이가 된 것 같아 보였다. 이때 경봉 선사가 시자 명정明正 스님에게 예의 “차 달여 와라”하고 소리쳤다. 경봉 선사는 차를 잘 사용하였다.


차는 이렇게 편리한 도구였다. 참으로 어려운 자리를 쉽게 만들고 또 실지로 속도 편안하게 하는 물질이었다. 차를 달이고 내오는 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두 노장은 서로 무언의,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수많은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당시 레비스트로스는 통도사 부근의 마을도 탐방했는데 방 하나, 부엌 하나의 초가집에 흥미로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내가 종교를 택한다면 불교를 택하겠다”고 한 학자였다.

                        - 박정진(한양대, 문화인류학자), 지안스님 취재증언에서 발췌.

 

 

4. 중생제도의 다양한 방편

⑴ 70명 대중이 사는데 병법秉法 제대로 할 사람이 없으니

 

경봉스님은 친견해보면 누구에게나 가식 없고 자상한 할아버지의 풍모를 지닌 어른이셨다. 나는 71년에 해인사 지월指月스님, 72년에 내소사 해안海眼스님 모시고 공부했는데, 은사이신 대은大隱스님까지 참선을 하고 싶으면 통도사 경봉스님께 가서 공부하라는 말씀을 듣고 극락암으로 왔다. 겨울이라 조사각 영사影祠와 12월에는 성해聖海선사 추모재가 있다. 한번은 삽삼조사 영사를 모시는데 노스님이 자꾸 걱정을 하시면서 70명 대중이 사는데 병법秉法 제대로 할 사람이 없으니 본사에 지원요청 하려고 하니 낮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내가 염불은 좀 해봤지만 염불하게 되면 화두정진에 많은 방해를 받을 것 같아서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하도 걱정을 하시고 또 대중 속에 할 만한 사람도 없는 관계로 “제가 해보겠습니다.” 했더니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


“맹상군孟嘗君이 평소에 많은 식객食客을 사랑에서 먹여 살리면서 살았는데, 하인이나 친척들이 저러다가 곡간이 거덜 난다고 걱정을 많이 했어. 그런데 난리가 나서 함곡관涵谷關을 지나 도망을 가야하는데 문이 열리려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지. 식객 중에 닭울음소리 잘 내는 사람이 새벽 훼를 치는 닭 울음소리를 잘 뽑았더니 인근 동네 닭들이 다 울어버렸어. 그러니까 문지기들이 새벽이 된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어서 맹상군이 살아난 적이 있지. 여러 대중이 모이니까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아 좋은 일이다.” 하시면서 “목소리 좋고 어산魚山도 제대로 배운 염불이다.” 하시고는 좋아하셨다. 예전에는 “중노릇 가르치는 것이 곧 염불의식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의식을 중요시하였다.


그 뒤부터 극락에서 공부 잘 해보라고 관심과 배려를 많이 받고 살았다. 은사 대은스님과는 일본 유학시절 만나 뵙고, 대은스님이 각황사覺皇寺(지금의 서울 조계사) 중앙포교사 1호였는데, 서로 항상 격려하시고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대은스님도 불교정화에는 적극 찬성하시고 자신 스스로 대처帶妻하던 여러 스님들과 함께 총무원을 찾아가서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고 격려금도 주시고 하셨다.

요즘처럼 신심이 줄어들고 사람 사이에 인정이 메말라 가는데 절집도 훈훈한 인간미가 넘치는 경봉스님 같은 어른이 계셨다면 이리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유머가 넘치고 얼굴이 훤하다 칭찬하시고 찾아오는 불자들 마음을 편하게 해주셨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다그치실 때는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열심히 해봐라. 인사 다니지 말고, 공부 잘 하고 있으면 그것이 제일이다.”라고 가르치시던 말씀이 항상 떠오른다.

                                         -조계종 어산장 서울 홍원사弘願寺 동주원명스님

                                                             (통도사 보궁지 7월호 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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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통도사 비로암
글쓴이 : 智 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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