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고 싶은 경봉대선사 어록語錄 2
- 경봉선풍중진불사회 취재이야기
5. 선을 닦아서 마음을 깨달아야 된다
나는 이북 사람인데 당시에 4대 도인이 계셨다. 혜월 만공 한암 용성 그런데 인연이 잘 안 맺어져서 경봉스님께 공부
하려고 했다. 경봉스님은 이理와 사事에 모두 통해서 행정도 보시고 염불도 잘 하시고 일대강사요 요중선鬧中禪을 닦아서 깨달은 분이라 어떤 일이든 근기에 맞게 잘 이끌어주셨다. 정화불사淨化佛事에 직접 참여는 안하셨지만 “정화가 옳은 길이다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하시며 후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항상 법문하기를 “선을 닦아서 마음을 깨달아야 된다. 주인공을 찾으라.”고 하셨다.
우리 집 가계가 그림 그리는 집안이다. 한번은 산신탱을 그려보라 그러셔서 그려 드렸더니, “산신의 부채에 있는 학이 산 학이냐 죽은 학이냐?”하고 물으셨다. 또 “산신은 오통오력五通五力이 자재하신데 부채는 어디에 쓰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요즘 큰스님들 돌아가시면 사리 찾느라고 난리고 사리가 없으면 선지식이 아니다 그렇게 풍조가 흘러가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만공 한암 경허 이런 도인들 사리가 나오지 않아도 도인이다. 사리란 뭐든지 집중해서 열심히 하면 사리가 생긴다.
- 부산 선주산방에서 불모 삼락자三樂子 석정石鼎 스님
6. 저 문으로 나갔다가 다시 오너라.
잘못 한 사람은 가고 이제 새 사람이 오는 거니까 다시 잘 살아라
한번은 내가 극락선원 입승을 보는데 선방 다각茶角스님이 밤에 다리를 접질러서 퉁퉁 부었어요. 그래서 치료받고 오라고 사중의 차를 보내었는데 시내에 가다가 교통사고에 시비까지 붙어서 싸우고 경찰 유치장에 갇혀서 연락이 왔어요. 원주실에서 대책이 없으니까 우리 절에 그런 스님 없다고 하였는데, 스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전화를 바꿔서는
“그 스님 우리 절 스님이 맞다. 내가 경봉인데 그 사람 풀어주라 내가 책임진다.”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몇 스님들과 경찰서에 가 보니까 다각스님이 잘못 한 게 더 많아요. 그래서 데리고 와서 공사公事가 붙었어. 찬반 양론이 팽팽한데 스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그 스님 짐 싸서 나가라 그래라.”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입승立繩인 내가
“스님 저도 함께 보따리 쌀랍니다. 저 다각스님 잘못 중에 제 잘못도 있습니다.” 했어요.
“그럼 함께 걸망을 싸라. 그리고 내 방에 오너라.” 그러셔요. 그래서 그 스님과 걸망을 정리해서 나가려고 조실방으로 왔더니,
“저 문으로 나갔다가 다시 오너라. 잘못 한 사람은 가고 이제 새 사람이 오는 거니까 그렇게 하고 다시 잘 살아라.”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경봉스님의 자비와 지혜가 저런 것이구나. 나중에 나도 저렇게 대중을 섭수하고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비한 모습은 마치 영축산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나’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 충주 석종사에서, 전국수좌회 공동대표 혜국慧國스님
7. 말 못하는 낙엽도 바람이 불면 하늘로 솟구쳐 오르려고 애를 쓰는데
- 살 활活 자 법문 ‘살아있는 정신’을 강조
경봉스님은 구한말에 태어나셔서 80년 제5공화국 출범까지 경험한 선지식이셨다. 격동의 한국사를 그대로 모두 경험하신 분이다. 태어나서 철들 무렵 한일합방을 보았고, 통도사 주지를 거치면서 45년 해방을 맞이한다. 또 48년 정부수립과 50년 한국전쟁, 54년 정화불사가 효봉 청담 경산 세 분의 정화보살로 인해 정화가 종단의 큰 화두일 때 스님께서 적극 후원하고 격려하셨다.
60년대 제3공화국 정부가 출범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보시고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그래서인지 통도사는 68년 경부고속도로 개통후 가장 각광脚光 받는 사찰이 되었다. 당시 통도사 주지 청하淸霞스님은 통도사 톨게이트를 추가로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여 결실을 보고, 교통이 편리함을 얻은 후 72년부터 매월 첫째 일요일 극락암에서 대중법회를 여시니 항상 수천 명이 운집하였다.
스님은 항상 살 활活 자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69년에 스님의 상족上足인 성수性壽스님 호를 활산活山이라 하시고, 75년에 출가한 고요한소리 역경원장 스님에게는 활성活聲이라 하시며 ‘살아있는 정신’을 강조하셨다.
“살아있는 정신으로 쾌활하게 모두들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하면 승속을 불문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참선을 해서 마음을 맑게 닦고, 열심히 사업하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라.”고 가르치셨다.
그 일을 가장 잘 받든 분이 대원거사 장경호張敬浩(1899-1975) 거사였다. 거사는 봄 여름 가을은 열심히 사업에 전념하고 겨울 한 철은 통도사 보광전普光殿에서 구하천보, 효봉원명, 향곡선사 경봉스님 등 당대 선지식과 함께 참선에 몰입한 대표적인 불자사업가이다.
스님께서는 항상 ‘살아있는 정신’을 강조하셨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공부에 찌들린 학생, 유신독재에 쫓겨 다니는 대학생 등이 극락암에 오면 어제 저녁 비에 떨어져 땅바닥에 뒹구는 낙엽을 보고
“저런 말 못하는 낙엽도 바람이 불면 하늘로 솟구쳐 오르려고 애를 쓰는데 하물며 만물의 으뜸인 사람이냐! 강에 사는 고기들도 펄떡 펄떡 뛰어오르고 바다에 파도가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솟구쳐 오르지 않느냐! 부처님도 가만히 낮잠 자는 사람에게는 가피加被를 안 내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살아있는 정신으로 수행을 하고 한 생 안 태어난 셈치고 참선해야 성불이 되는 거지, 열심히 하려고 못을 박아놓고는 안 찔리려고 피해서 졸고 있는 수좌들 보고 헛공부 한다고 야단치시고, 열심히 기도는 하지 않고 스님들 험담이나 하고 선방에서 버리는 시주물 보고 신도들이 먹으려고 덤벼들면 한사코 “그것 먹으면 업장이 더 무거워진다.”고 야단치셨다. 그래서 불자들에게는 부처님 가피를 얻기 위해서는 관음기도, 독성기도를 권하셨다. 전국 관음성지에 모두 스님이 친필親筆 편액을 보내시고, 불사를 후원하셨다. 불국사 범종을 시작으로 보리암과 원효암에 종을 세우시고 통일에의 염원도 발원하셨다.
- 경주 함월사 조실 우룡雨龍스님
8.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멀리 계신 것 같지 않고, 또 문중보다 더 큰 문중으로 여기시는 모습이었지요
[질문] 이번 추모 사업을 하면서 한암스님 그리고 탄허스님 두 분 이야기를 스님이 좀 해주시지요.
[혜거스님] 예. 저희 한암 노스님이나 저희 은사 탄허스님께서는 아마도 그 수행하시는 과정에서 가장 큰 도반이면서 또 탁마하면서 스스로를 이렇게 동시에 여기는 그런 가장 지인知人 중에 가장 측근 지인으로 한암 노스님께서 마음에 항상 품고 계시는 것을 저희 후학들이 느낄 수가 있고요. 또 저희 스님께서는 항상 경봉 큰스님에 대한 경앙하고 추앙하는 그런 마음을 한 번도 내려놓으신 일이 없는 것으로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멀리 계신 것 같지 않고, 또 요즘 흔히 말하는 문중관계에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면서도 문중보다 더 큰 문중으로 이렇게 여기시는 모습은 늘 저희 스님에게서 느낄 수가 있고, 저희 스님의 그런 마음 때문에 오대산으로 당심으로 소임자 모든 스님들도 경봉 큰스님에 대한 그런 어른의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터뷰에 응하게 되니까 더 그런 것들이 새삼 떠오르고 감개가 더욱 깊어집니다.
탄허스님이 6.25 날 것을 예측을 하시고 피난 갈 것을 말하는데, 한암漢岩노스님께서
“나는 여기 그냥 남아 있을테니까 너희들끼리 가라!”
[질문] 스님, 6.25때 한암 노스님이 상원사에서 입적하신 부분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그때 그때 탄자 허자스님 모시고 스님께서도 남쪽으로 피난 내려오셨습니까?
[혜거스님] 저는 그때는 출가 전이여서 듣기만 했던 이야기입니다. 듣기만 했는데 이제 그 일로 인해서 우리 은사 탄허呑虛스님께서는 세상에 상당히 유명하게 알려지게 된 계기도 되지 않았습니까? 6.25때 6.25가 나던 해 정월달에 6.25 날 것을 예측을 하시고 한암스님을 모시고 피난 갈 것을 권장을 하는데, 한암노스님께서 나는 여기 그냥 남아 있을테니까 너희들끼리 가라! 그러는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할 때 “경봉 큰스님 계신 처소로 피난을 가라.”고 해서 대중을 거느리고 저희 스님께서 경봉 큰스님 계신 곳으로 극락암으로 피난을 가신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아닌 대중을 함께 더욱이 피난길로 찾아간 곳이 극락암이었다는 점과. 또 경봉 큰스님과 한암노스님과의 친분으로 한암노스님이 직접 가셨다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만, 직접 가시지도 않고 그 제자들만 우르르 달려들어서 피난을 온 제자들을 자기 권속처럼 따뜻하게 맞이해서 전부 피난을 하게 해주셨다는데 대해서 그 인연이 아니었더라면 그때 당시 오대산에 저희 은사스님을 위시한 여러 스님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하는 그런 사건입니다.
[질문] 그러면 저 전쟁 일어나기 전에 탄허스님이 대중들하고 내려왔네요?
[혜거스님] 그렇습니다. 네
[질문]군인들이 들어갔을 때는 당신하고 시자 한 사람 밖에 없었구먼요?
[혜거스님] 네. 그렇습니다. 시자하고 그때는 그렇습니다. 대중이 없을 때입니다.
조그만한 병이 들어서 치료를 받으시고 하는 일에서부터, 어떨 때는 법을 그 묻고 주고 받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깜짝깜짝 놀랄 만큼 서릿발 같은 법이 오가는 그런 내용.
[질문]스님, 제가 「한암집」하고 「노스님 일기」를 이렇게 봤는데, 한암스님과 경봉스님의 어떤 문중 관계라던가 또는 법을 쓰는 방식은 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혜거스님] 그 어찌 감히 짐작을 하겠습니까만, 그 경봉 큰스님께서 또 저희 노스님 한암 노스님께서 서로 주고 받으신 서간문이 한 24편이 보존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서간문을 이렇게 살펴보면 일상생활에서 소위 말하면 소임을 맡고 소임을 물러나고 또 어쩔 때면 조그만한 병이 들어서 치료를 받으시고 하는 일에서부터, 어떨 때는 법을 그 묻고 주고 받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깜짝 깜짝 놀랄 만큼 서릿발 같은 법이 오가는 그런 내용. 이런 것에서 그야말로 큰스님들의 법을 조그마치라도 엿볼 수가 있는데, 그 중에서 아주 괄목할만한 것을 저는 일상생활에 하나도 걸치지 않고 하나도 덮어쓴 것이 없이 훌훌 벗어던지는 그런 모습들을 서신으로 주고 받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법이란 정말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벗어버리고 껍질을 벗어버리는 데 정말 법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그런 충천기衝天氣를 묻는다든지 또 거기에 대해서 답을 하신다든지, 이럴 때 보면 저는 그야말로 한 점 물러설 곳 없는 그런 예리하고 날카롭고 정확한 이런 문답이 오고가시는데 대해서 저희들이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그런 경지로 이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중門中이나 친親 불친不親을 가리지 않으시고 우선 도에다 두셨다는 점- 경봉 큰스님께서는 유일하게 도가 있는 곳에 항상 마음을 쓰신 분이었지요.
문중이나 친親 불친不親을 가리지 않으시고 우선 도에다 두셨다는 점
[질문]다음은 경봉스님의 리더십, 덕화의 모습을 한 번 제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예전 스님들은 그 스승이라던가 또는 은사스님의 관계가 있으면 그 밑의 권속들도 다 그 쪽에 어른들을 존경하고 항상 서로 위해주는 그런 부분들이 많은데, 그런 부분으로 봤을 때 아까 말씀하신 피난 갈 때 모습이라든가, 또는 경봉스님이 한 때는 효봉스님 열반하실 무렵에 표충사를 내어드린 일이라던가, 이런 것에서 참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을 한 번 비교해 본다면 그런 부분에 아쉬운 점도 많은 것 같은데 한 말씀 해주시지요.
[혜거스님] 근래의 큰스님으로 그러한 행보를 하신 분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왜 그러냐 하면 문중이나 친親 불친不親을 가리지 않으시고 우선 도에다 두셨다는 점을 볼 수가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그 한암노스님께 그야말로 깊은 마음에 정을 가지고 계셨던 부분, 이것도 하나의 도에 의한 것이지 하나의 세상 사람들의 인정에 의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까 효봉曉峰 큰스님과의 관계에서도 도에 바탕을 두신 것이지 다른 데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봉 큰스님께서는 유일하게 도가 있는 곳에 항상 마음을 쓰신 분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탄허스님이 생전에 못다한 일
-하나가 불교학개론을 정리하시려고 이렇게 자료 모으시고 이렇게 전부 정리를 하셨는데 그걸 정리해서 출간하지 못하신 일,
-또 한 가지는 경봉 큰스님 비문을 해드리지 못한 일입니다.
[질문] 스님, 유물관을 잘 만들어놓으셨는데 경봉스님 추모사업에 대해서 격려의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혜거스님] 그런 일을 통해 보면 경봉 큰스님에 대한 우러른 마음이 얼마나 크셨으면 그걸 꼭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가지고 계셨는데, 그런데 해드리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빨리 해드리지 왜 늦췄을까? 이건 생각해보시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요. 저희 스님 같은 경우 문장 하나 만들고 하는 것 잠시 만들지요. 또 그리고 문장하시는 분들은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존경하는 분을 잘하려고 하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계속 생각을 너무 많이 하시고 너무 많이 하시다 보니까 그걸 해드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이 점이 아마 저희 스님께서 지금 굉장히 아쉬워하실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경봉 큰스님께서 이렇게 큰 덕화를 펴신 인연으로 저희들도 지금도 극락암 그러면 거꾸로 저희들 본사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큰스님의 덕화사업이 정말로 잘 이뤄져서, 앞으로 우리 종단에 우리 수행하는 스님들이 문중이나 개개인의 이런 상황보다는 도를 향상하는데 모두 크게 분발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신다면 경봉 큰스님의 기념사업이 정말 좀 크게 확산되어서 모든 종단의 큰 귀감이 되도록 해주셨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오늘 간절하게 솟아오릅니다.
추모사업을 하시는 스님들이 대단히 부럽고 정말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런 큰 어른들을 우리가 찾아내서 그것을 계승하고 전승傳承하려고 하는 노력이 정말로 없다면 큰스님들 덕화가 앞으로 빛을 발할 수가 없거든요.
그 중에 한 마디 꼭 필요하면 무엇이 있느냐면 우리나라는요. 옛날부터 큰스님들 열반하시고 난 뒤에 큰스님 전기가 남아 있는 것이 굉장히 빈곤한 나라입니다. 지금. 그럴 때 이렇게 경봉 큰스님 기념사업을 통해서 아주 그야말로 큰스님의 사상이 잘 기록되어서 정말로 잘 전승될 수 있도록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탄허문화재단 이사장 금강선원장 혜거慧炬스님
-- 통도사 보궁지 8월호 게제
출처 :원각삼소 원문보기▶ 글쓴이 : 삼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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