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碧眼)은 법호, 법명은 법인(法印)인 스님은 1901년 경북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난 스님은 35세 때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면서 당대의 선지식인 석우(石友)스님 회상에서 불가의 도리를 배우고 정진했다.
제방선원을 돌며 화두를 참구하던 스님은 3년 뒤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峯)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한다. 늦은 나이에 출가를 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을 하고 어른 스님들을 모시는데 정성을 다했다.
스님은 경봉스님께 매일 아침 문안을 드렸다. 지팡이를 쥐고 극락암에 도착한 벽안스님은 은사 스님이 주석하는 경내에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가지 않았다. 암자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지팡이를 세워놓고, 들어갔다. 은사 계신 곳에 지팡이를 짚고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 선원에서 하안거 정진 중이던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접하고 오도송을 읊는다.
大道元來無繫縛(대도원래무계박) 대도는 원래 얽매임이 없으니
玄機何處關形成(현기하처관형성) 현묘한 기틀 어찌 모양에서 찾으랴
九旬磨劍寒霜白(구순마검한상백) 구순 안거에 서릿발 같은 지혜의 칼을 가니
擊罷祖關各方行(격파조관각방행) 조사관을 격파하고 마음대로 노닐리라
이후 통도사와 범어사 해인사 등의 선방에서 정진을 거듭한다. 43세에는 범어사에서 영명(永明)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내시면서 청렴결백하고 公私를 구별하는데 있어 엄격함을 지니고 있었다. 공석에서는 가을서리(秋霜)와 같은 엄정(嚴正)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사석에서는 봄바람(春風)같은 따뜻함으로 대중들을 제접했다.
원효학원 이사와 동국학원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조계종 중앙종회 초대의장을 비롯해 2 · 3대 의장을 역임하면서 종단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으며, 1980년에는 조계종 원로원장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말년에 머물던 요사채에 ‘寂墨堂(적묵당)’과 ‘淸白家風(청백가풍)’이란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당신이 지녔던 수행의 면목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붓글씨 또한 스님 성품을 닮아 단아했다. 스님은 1987년 12월25일 통도사 적묵당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는 87세 법납 53세였다.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靈鷲片雲(영축편운) 영축산의 구름
往還無際(왕환무제) 오고 감에 때(時)가 없네
忽來忽去(홀래홀거) 홀연히 왔다가니
如是餘時(여시여시) 때가 이와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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