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의 고승. 호는 구하(九河), 자호는 축산(鷲山), 성은 김씨이다. 본관은 경주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서 출생했다. 구하 천보(九河 天輔·1872∼1965)스님의 부친은 김한술(金漢述) 선생. 본관은 경주. 모친은 신씨(申氏)였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이다. 축산(鷲山)이란 자호(自號)를 사용했는데,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한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모에게 출가를 하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이때가 1884년 겨울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였다. 13세가 되던 1884년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했고, 경월도일(慶月道一)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듬해인 1890년 예천 용문사에는 용호해주(龍湖海株)스님 문하에서 경학과 참선을 공부하고 1896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같은 해 성해남거(聖海南巨)스님의 전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았다. 수행을 거듭하여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다 오도의 경지를 맛본다.
1908년 명신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 해동고등학교, 1932년)와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1934년)를 설립하여 교감ㆍ교장을 역임하면서 어려운 절 살림과 암울한 일제치하의 시대 속에서도 인재양성에 힘썼다. 또한 통도사 주지로서 1910년 한일합방 후 30본산 주지가 되었으나 사규가 점차 무너짐을 보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있었다.
1919년 무렵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열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님은 통도사의 재정으로 군자금을 지원했는데,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안창호가 보낸 밀사에게 5천원, 경성 「화신공보」 사장 초월동조(初月東照)에게 2천원, 지암 종욱(鍾郁)이 군자금을 모집할 때 3천원, 독립운동가 정인섭에게 1천원 등 모두 1만3천원이었다.
또한 상해에서는 그와 성월 등이 함께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린이 교육에도 힘써 마산 대자유치원, 진주 연화사 유치원, 울산 동국 유치원 등을 설립하였다.
1911년 11월부터 1925년 8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고,1917년 1월부터 3년간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을 지냈다.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 학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포교의 중요성도 강조하며 마산 포교당 정법사(1912), 진주 포교당 연화사(1923), 창녕 포교당 인왕사(1923), 물금 포교당(1924), 언양 화장사(1927), 창원 구룡사(1929), 의령 수월사(1930), 부산 연등사(1932), 울산 포교당 해남사(1936), 양산 포교당 반야사(1940) 등 많은 포교당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전법을 전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역경사업에도 힘써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3곳이 힘을 모아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12년 11월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발표 동참, 백산상회 안희제와 범어사 김상호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제공, 1920년 3월 의춘상회(의춘신탁)를 설립해 독립자금 마련, 1920년 4월 동아불교회를 설립해 항일불교운동을 시도하는 등 조국해방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49년에는 중앙불교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1965년 10월3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납 81세였다. 제자는 전 종정 월하(月下) 스님 등 30여명의 출가제자가 있다.
문손들에 의해 구하스님의 시문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인 『축산문집(鷲山文集)』과 『금강산관상기(金剛山觀相記)』가 최근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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